[강현철의 세상만窓] "금융위기는 반드시 다시 온다"
위기 대응 강력 수단인 금융안정계정 도입 무산
1인당 예금보호한도도 올리지 않아
버냉키 "위기는 갑작스럽게 찾아와, 미리 정책도구 마련해놓는 게 중요"
"금융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사람은 누구나 결국 한번은 죽는 것처럼 금융위기도 반드시 발생하게 돼있다. 제임스 볼드윈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기는 다시 올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을 맡아 위기 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밴 버냉키(Ben S. Bernanke)의 말이다. 버냉키는 '헬리콥터 밴'(헬리콥터를 타고 달러를 뿌리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까지 당시 유례없던 '제로 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세계를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평가를 듣는다. 비록 그같은 '초저금리 통화완화 정책'이 그후 다시 집값 폭등과 물가 급등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했지만 말이다.
버냉키는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및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티머시 가이트너,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였던 헨리 폴슨 주니어와 함께 쓴 '위기의 징조들'(Firefighting)에서 "금융위기는 어느 순간 한꺼번에 일어나며, 정부로서는 위기 초기에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도구(policy tool)들을 미리 갖춰 놓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위기가 발생한 이후에나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도구와 정책을 마련하려 하면 실기(失機)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다시 스멀거리는 위기의 징후들
한국 경제에 위기의 징후가 다시 스멀거리고 있다. 2008년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처럼 부동산이 또 뇌관이다. 초저금리와 막대한 시중 유동성 영향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던 아파트 가격이 반락하면서다. 건설사와 금융사들이 얽혀있는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의 부실화가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금융권 부동산 PF 대출 연체율은 지난 9월 말 기준 2.42%로, 6월 말(2.17%) 대비 0.24%포인트(p) 상승했다. 작년 말(1.19%) 대비로는 1.23%포인트 뛴 것이다. 대출 잔액도 134조3000억원으로, 전분기 대비 1조2000억원 늘었다.
업권별로 살펴보면 상호금융권 PF 대출 연체율이 4.18%로 전 분기 말(1.12%) 대비 3.05%포인트 상승했다. 저축은행권 연체율도 0.95%포인트 오른 5.56%, 보험업권 연체율이 0.38%포인트 오른 1.11%다. 증권사들의 PF 대출 연체율은 13.85%로 업권 중 가장 높았지만, 전분기 말(17.28%) 대비로는 3.43%포인트 하락했다.
금융위원회는 "상호금융권 자본과 충당금 적립 규모 등을 감안할 때 업권 전반의 건전성 리스크로 번질 가능성은 작다"고 하지만 저축은행이나 새마을금고 중심으로 소규모 위기의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위기 대응책 제대로 못짚는 정부와 정치권
문제는 언젠가 위기가 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부와 정치권이 버냉키가 지적한 것처럼 위기 발생시 즉각 동원할 수 있는 정책 마련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는 위기 발생시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을 자초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게 △금융안정계정 도입 무산 △1인당 예금보호한도 상향 실패를 꼽을 수 있다.
금융당국은 그동안 연내 '금융안정계정'의 도입을 추진해왔다. 금융안정계정은 예금보험공사(예보) 내 기금을 활용해 유동성 위기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금융사에 선제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제도다. 현재 예보는 은행을 비롯해 보험사·금융투자사·종합금융사·저축은행 등 각 금융사로부터 예금보험료를 받아 기금을 적립해 운영하고 있다. 현행대로라면 예보는 금융사가 파산한 뒤에나 이 기금을 활용해 유동성을 공급하지만, 금융안정계정이 도입되면 선제적으로 자금을 지원해 일시적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금융사의 파산을 막을 수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12일 오전 10시 법안소위를 열 예정이었으나, 여야 의사일정 합의 실패로 회의가 취소됐다. 금융안정계정 도입을 골자로 한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은 현재 법안소위에 계류 중으로, 오는 28일 본회의 전까지 입법 절차를 밟지 못할 경우 내년 5월 국회 회기 종료에 따라 폐기된다.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은 지난 2월 국회 정무위원회에 상정된 후 여러 차례 법안소위에 상정돼 논의됐으나, 더불어민주당에서 신중론을 펼치면서 법안 통과가 지체됐다.
지난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에서 보듯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디지털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현상)'으로 금융사 파산도 과거와 달리 빛의 속도로 가능해졌다. 금융안정계정이 도입되면 일시적 유동성 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금융사를 신속하게 도와 금융시스템 불안정을 방지할 수 있다.
예금보호한도 상향도 이미 물건너간 실정이다. 금융당국은 "한도 상향에 대한 이득보다 부작용이 더 크다"며 23년째 5000만원으로 묶여 있는 1인당 예금보호한도를 그대로 뒀다. 금융위원회의 논리는 1억원으로 한도 상향 시 보호를 받는 예금자의 비율이 98.1%에서 99.3%로 1.2%포인트 상승하는 데 그치며, 한도 상향의 편익은 소수 5000만원 초과 예금자(1.9%)에만 국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견(短見)도 이런 단견이 없다. 예금자보호제도는 금융사의 파산이나 영업정지 등의 사유로 예금을 지급할 수 없는 경우 은행을 대신해 정부 기관인 예금보험공사가 예금 지급을 보장함으로써 고객을 보호하는 제도다. 예금자 보호도 보호지만 더 큰 기능은 개별 금융사의 파산으로 인해 전체 금융시스템이 망가지는 걸 방지하는 것이다. 예금보호한도를 높이면 위기 발생시 예금자의 심리를 안정시켜 전체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킬 수 있다. 위기는 일종의 심리싸움이다. 시장과 정부 간 싸움에서 정부가 승리해야 전체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지키고 위기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
예금자보호제도는 지난 1995년 12월 예금자보호법이 제정되면서 도입됐다. 예금보험제도는 보험의 원리를 이용해 예금자를 보호한다. 예보는 예금보호 대상 금융회사(부보금융사)로부터 보험료(예금보험료)를 받아 기금(예금보험기금)을 적립, 금융사가 파산 등으로 예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되면 대신 예금을 지급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1인당 예금보호한도는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적다. 미국의 예금보호 한도는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다. 영국은 8만8000파운드(약 1억5000원), 일본은 1000만엔(약 9000만원)이다. 1인당 GDP 대비 보호 한도로 비교해도 미국은 3배, 영국과 일본은 2배 이상으로 1.17배(2022년 기준) 수준인 우리나라와 차이가 크다.
우리나라 예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곳이 미국에선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다. FDIC가 SVB와 시그내쳐(Signature) 은행 파산때 즉각 예금전액보호 조치를 내린 것은 두 은행의 파산이 전체 금융리스크로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조치는 효과를 거둬 두 은행 파산이 '찻잔속의 태풍'에 그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예금보호한도 상향이 효과가 없다면 FDIC가 이런 조치를 취했을리 만무하다.
금융안정계정 도입과 1인당 예금보호한도 상향 무산은 정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을 방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구태여 수억원의 연봉을 줘가며 고위 공무원이나 국회의원들을 둘 필요가 없다. 강현철기자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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