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직장 내 괴롭힘의 세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된 지 5년 차에 접어들었다. 매년 신고 건수는 늘고 있으며, 올해가 채 가기도 전인 지난달 말까지 집계된 신고 건수만 8800건에 달한다.
신고 건수가 늘고 있다는 것은 현장의 노동자들이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이 직장 내 괴롭힘이다'라는 점을 인지 가능한 인식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실제로 블라인드나 리멤버처럼 직장인들이 다수 이용하는 익명 게시판에는 직장 내 괴롭힘을 토로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반면,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사건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비율은 지난 해 기준 1.1% 정도에 그친다. 일각에서는 허위 신고가 남발되고 있다느니, '을의 갑질'이 심각해서라느니 주장하지만 이같은 분석은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이다. 애초에 '을의 갑질'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 아닌가. 을은 갑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을(노동자)'이라는 위치에 귀속되어있는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의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사용자 등의 괴롭힘 수법은 보다 교묘해지고 있다. 교묘한 수법의 따돌림·차별·무시는 노동자 입장에서 앞뒤 맥락을 다 따져봐야 괴롭힘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노동부에 신고를 하더라도 입증이 어려운 유형의 괴롭힘 사례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같은 사무실의 동료들은 내가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임을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가해자와 직장 생활을 계속 해 나갈 그들에게 피해 사실 증언을 기대하기도 당연히 어렵다. 현실적으로 사무실에서 매 순간 녹음을 생활화하기 어려운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눈 뜨고 당하는 심정'을 매일 감수하며하루하루 참아내고 있다.
노동자가 어렵게 온갖 증거를 모아 신고하고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되더라도 노동자의 근로환경이 하루아침에 나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폐쇄적 조직문화에 익숙해져 폭행을 용인하던 사무실에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물론 국회가 이같은 현실을 '나 몰라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2021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근로기준법 개정안(본 의원을 포함한 다수의 의원이 발의해 환경노동위원회 대안으로 완성됨)이 통과됨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한 사업장의 사용자는 당사자 등을 대상으로 객관적인 조사를 실시할 의무가 생겼다. 사용자 등이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하거나 조치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과태료가 부과된다. 사용자에게는 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 역시 누설 금지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정작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다. 가해자 벌칙 신설이 담긴 개정안은 국회계류 중이다. 사용자가 가해자일 때는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노동청에 진정서와 고소장을 접수할 수 있지만, 사용자가 아닌 상사·동료 등이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인 경우에는 사용자가 정하는 조치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은 사용자는 늘 조용히 조치하고 어영부영 넘어가는 사례가 태반이다. 피해자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기도 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을 해결해보고자 2년 전 피해근로자가 사용자의 조치에 이의가 있는 경우 노동위원회에 시정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노동위원회가 사업주의 직장 내 괴롭힘 조치에 대해 사업주에게 시정명령을 할 수 있게 된다. 직장 내 괴롭힘 예방강화 및 사후적 구제를 어느 정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마련했다. 하지만 이 법안 역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잠들어있고, 21대 국회는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노동위원회도 나설 수 없는 직장 내 괴롭힘 미해결은 노동자의 정신질환, 심한 경우 '죽음'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직장 내 괴롭힘에 따른 정신질환이 산재로 인정받을 수준이 돼어야만 의료·직업재활 지원이 이루어지는 데, 이 정신질환 산재 자체가 인정받기 힘든 구조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이 기본적으로 육체적 건강을 중심으로 규율되고 있으며, 노동자의 심리·사회적 건강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제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당사자가 자비로 치료비를 부담해야 하고, 직장을 떠나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며, 정신질환 사망 산재(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2019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50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정신질환 사망 산재로 사망한 현실은 직장 내 괴롭힘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도입 이후 4년이 훌쩍 넘게 지났다. 근로복지공단이 정신질환 산재, 특히 극단적 선택 관련 인정 기준을 완화할 필요성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선량하다 믿고 있는 사용자도 늘 '자기 검열'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나의 언행이 노동자에게 모욕적이지는 않은지, 심리적 압박을 느낄 정도의 통화 시도 또는 강압적인 지시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휴일·초과 근무를 당연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그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이 '괴롭힘'이라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소년은 개구리를 '괴롭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회와 정부는 늘 돌을 맞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leesj545@hanmail.net
〈필자〉간호사 출신 노동운동가로, 제21대 총선에서 노동 부문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1991년 연세의료원에 간호사로 입사한 뒤 연세의료원노조, 전국의료산업노동조합연맹, 연세재단 산하 노조협의회 위원장, 무상의료국민본부 집행위원,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정치권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전국여성위원회 부위원장, 전국노동위원회 상임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당명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바뀐 후 전국여성위원회 부위원장, 전국노동위원회 부위원장, 전국노동위원회 위원장, 최고위원을 맡아 당내 여성·노동 전문가로 활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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