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촌에는 매년 세 번 흉년이 옵니다”
“아주 가파른 비탈길을 늙은이들이 가쁜 숨을 씩씩 쉬면서 올라가고 있어요. 그게 지금 농촌이에요. 이 사람들이 사라지면 농촌·농업은 완전히 붕괴되는 거예요.”
2023년 11월7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구만리 우리밀가공공장에서 최성호 대표를 만났다. 30여 번 체포되며 1970~1980년대 수세 철폐 투쟁 등 농민운동을 이끈 장골로 유명하다.(농사지으려면 정부에 물값을 내던 관행은 농민 저항으로 점점 줄어들다, 2000년 철폐됐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올해도 3천 평 농토에 밀과 벼를 키웠다. 얼마 전엔 다시 밀을 파종했다. 1989년 죽은 밀을 살려보겠다며 나고 자란 고향 땅에 밀 종자를 구해와 뿌린 지 34년째다. 그사이(1989~2022년) 농촌 인구는 3분의 1로 줄고(678만5천→216만6천 명), 65살 이상 고령자 비율은 2.6배(19.0→49.8%) 늘었다.
“밀 종자마저 구하기 어려웠어요”
―밀 파종은 잘했나요.
“벼를 수확하고 바로 밀을 심기 때문에 굉장히 바쁜 시기예요. 예전엔 11월15일이면 밀 파종이 다 끝났는데 요즘은 12월 초까지도 심습니다. 온난화로 오히려 너무 일찍 심으면 웃자라버려요. 잎이 두세 개 나온 상태에서 겨울을 맞아야 제대로 자라 (날씨와 밀 생육 상태를)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밀살리기 운동이 33년 됐습니다.
“제가 가톨릭농민회 1세대입니다.(최 대표는 1983~1986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을 했다.) 1990년대를 앞두고 1세대가 모여 각자 고향으로 가서 새로운 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한 갈래로 농민과 소비자가 더불어 살자고 ‘한살림’을 만들었어요. 유기농 운동이 다른 갈래예요. 당시만 해도 증산의 시대라 ‘저걸 어떻게 먹을까’ 싶을 정도로 농약을 엄청나게 쳤어요.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자는 취지였죠. 그리고 마지막 갈래가 1984년 정부 밀 수매 폐지, 즉 밀 포기로 사라진 우리밀을 되살리자는 운동이었어요. 그런데 그 흔했던 밀 종자마저 구하기 어려웠어요. 농업시험장에 의뢰해서 남은 밀 종자 14㎏씩을 보따리에 담아다가 우리 회원들이 전남·전북·경남 세 곳에 가서 200평 밭에 파종한 때가 1989년입니다. 이듬해 수확하고 1991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가 만들어졌지요.”
―시행착오도 많았을 듯한데요.
“처음엔 밀만 생산하면 잘 팔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분소가 없는 거예요. 농민회원들 출자금을 받아다 영농법인으로 (1992년에) 우리밀가공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찧어서 팔았는데, 껄끄럽고 품질이 안 좋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채로 거르고 롤러 방식으로 바꾸고 여러 노력을 하다가 2007년 현재의 저 (우리밀가공)공장을 만들었죠. 대형 제분시설에서 내다 버린 폐품을 주어다가 저 공장을 지은 거예요. 그때는 농림부에서 ‘밀’이란 말이 아예 빠져버린 상태였어요. (웃음) 공장이 만들어지고 10여 년은 봉급을 받아간 사람이 없어요. 힘을 합쳐 열심히 찧어가면서 ‘운동’을 한 거죠. 지금도 우리밀 농사는 운동적 성격이 강합니다. 6년째 가격이 3만9천원입니다. 그사이 물가는 얼마나(10.3%↑) 올랐게요.”
―과거에는 밀이 흔했습니까.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구례에는 마을마다 밀 방앗간이 있었어요. 벼 심고 그 논에다 밀과 보리를 심었어요. 6월에 밀을 수확하면 전 부치고 칼국수 만들고 이웃들과 나눠 먹었죠. 솥에다 막걸리 넣어 부풀어 오르게 해서 지금으로 따지면 빵도 만들었어요. 우리는 개떡이라 불렀죠. 그러다 미국의 남는 밀이 밀려오고,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농민이 부역을 가면 밀가루를 몇 포대씩 줬어요. 그러면서 방앗간도 다 망하고 흔하던 밀이 사라졌죠. 지어봤자 팔 데가 없으니까. 나중에 증산에 성공하더니 보리도 안 심었어요. 구례도 겨울에 논밭을 다들 묵히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농촌 풍경은 파릇파릇했어요.”
“수입해서 먹겠다는 건 목표라고 할 수 없어”
―밀농사의 좋은 점은 뭔가요.
“겨울에도 들판을 푸르게 덮어서 산소를 만들고 환경적으로도 아름답잖아요. 수입밀보다 좋은 점이 많지만, 무엇보다 우리밀은 무농약 밀입니다. 미국 등은 여름에 밀을 키워 다른 풀이랑 경쟁해야 해서 농약을 많이 뿌려야 하지만, 한국은 겨울이라 거의 뿌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노는 땅에 곡식을 심으니 농민들 소득이 많아집니다. (최 대표가 돋보기를 쓰더니 계산기를 두드렸다.) 우리 국민이 1년에 먹는 밀이 6천만 가마니(40㎏ 기준, 240만t)입니다. 한 가마니에 4만원씩 계산하면 2조4천억원입니다. 수입밀을 국산밀로 바꾸면 이 돈이 농민들 주머니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농촌경제가 살고, 소비가 살아나고 지역경제와 국가경제가 삽니다. 젊은이들이 농촌에 오려 하지 않겠습니까. 정부가 지역 화폐·상품권으로 공짜로도 돈을 주지 않습니까. 남아돌아도 많이 생산하게끔 해야 합니다. 다 국가의 자원입니다. 어디를 깎아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연에서 생산되는 거잖아요.”
―2020년 밀산업육성법 제정으로 밀농사 여건은 나아졌나요.
“지금처럼 자급이 아니라 수입해서 먹겠다는 건 목표라고 할 수 없습니다.(밀산업 기본계획에 따른 밀자급률 목표는 2030년 10% 달성이다. 최 대표는 이 목표가 ‘90%는 수입한다’는 뜻임을 꼬집었다.) 쌀과 밀은 식량이고 주곡이잖아요. 주곡은 자급해야 하고, 정부 정책이 모든 부분에서 지원되고, 농민과 정부가 합세해야 합니다. 그래야 소비자가 편안하게 곡식을 먹을 수 있죠. 정부의 밀 수매도 (2019년) 부활했지만, 정부는 이 제도로 농민이 아니라 대기업을 돕습니다. 예산 100억원을 들여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창고에 비축해놓고 반값(㎏당 975원에 사들여 400원에 판매)으로 대기업에 팔고 있어요. 그 밀을 잘 활용해 돈을 벌어서 농민을 위해 쓸 생각을 해야 하는데, 예산은 그냥 사라지고 농수산식품유통공사와 대기업만 돈을 법니다. 가루쌀도 그래요. 쌀은 쌀인데 그걸 왜 밀가루로 만들려 합니까. 가루쌀 지원한다고 밀을 외면하잖아요. 자급하려면 당연히 수입밀과 우리밀 가격이 거의 같아야 하는데, 정부는 이런 밀 정책을 세우려 하지 않아요.”
―농촌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기후변화로 가뭄·홍수·폭우에 식량문제가 대두하는데, (곡물)자급률 20%인 나라에서 식량(쌀)이 남아도는 걸 걱정합니다. 자급도 못하는 나라의 정부가 많이 남아서 안 팔린다며 가격이 떨어진 부담을 전부 다 농민한테 떠넘깁니다. 우리 농촌에는 매년 세 번 흉년이 옵니다. ‘수입농산물 가격 폭락’이 한 번, 아무리 잘 농사지어도 농산물 가격이 높다고 수입농산물을 확 들여와 가격을 폭락시켜버립니다. 쌀도 ‘의무수입곡’으로 40만t(2022년 기준 국내 쌀 생산량의 10.6%)이 싼값에 들어오는데, 쌀값이 올라가겠습니까. 그리고 ‘자연재해 흉년’이 옵니다. 기상이변으로 폭우가 내리고 태풍이 불어서 흉년이 옵니다. 마지막으로 ‘풍년 흉년’이 옵니다. 풍년이 들면 농민들이 좋아서 장구 치고 그래야 하는데, 가격이 내려가 흉년이 돼버립니다. 이 세 가지 흉년을 어떻게 버팁니까. 농촌을 세밀하게 돌아다니면서 보면 노인들이 농사를 안 지을 순 없으니까 어떻게든 농사짓는 게 농촌 현실입니다. 올해 3천 평 농사를 지었지만 수익이 420만원입니다. 그 땅을 빌려준다고 계산하니 300만원 수익이 나옵니다. 인건비 계산하면 농사를 안 지어야 맞잖아요.”
자식들이 농사짓지 않으려는 이유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최 대표도 농사를 접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얼마 전에 자식들 불러모아서 ‘힘에 부쳐 내년부터 대신 지어달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농사지어서는 아이들 학원 보낼 돈도 못 번다’고 해요”라고 말했다.
“농촌에서 낮은 가격이지만 부지런히 농사지어 자식들을 키워 도시로 내보내고, 기업들이 이 자식들 싼값에 노동시켜 제품 만들고 수출해서 이만큼 부자가 됐잖아요. 농민 희생 위에 이만큼 왔습니다. 붕괴 직전인데, 농촌을 이제는 모두가 나서서 도와야 할 때 아닌가요.”
구례(전남)=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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