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44년전 오늘의 기억… ‘서울의 봄’ 진실과 허구

이도형 2023. 12. 1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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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박정희에 충성보이며 승승장구… 하나회 기틀 닦아
장태완, 반란 막으려 했지만 ‘1인 회군’·‘광화문 대치’는 허구
정승화 체포 ‘사후 결재’ 기록… 쿠데타 처벌의 결정적 증거

12·12 군사반란을 극화한 영화 ‘서울의 봄’이 12일 자정까지 누적관객수 716만명을 기록하며, ‘천만 영화’를 향해 순항 중이다. 관람 중 격정과 긴장감으로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체크하는 ‘심박수 챌린지’와 같은 유행이 번지거나, 각종 커뮤니티에 감상이 올라오고, 극 중 전두광(전두환)을 연기한 배우 황정민의 다른 작품이 덩달아 호응을 얻는 등 영화의 반향은 크다.

등장인물들이 가명을 쓰긴 했지만 분명 ‘서울의 봄’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영화 속의 모든 부분이 실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감독의 상상력으로 구성됐고, 극적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과장이라는 조미료가 첨가되기도 했다.
영화에 나오지 않거나 배경 설명이 필요한 몇가지 역사적 일화와 함께 영화와는 다른 역사의 기록을 실제 사건이 일어난 12월12일을 기해 되짚어본다. (이 기사는 영화 내용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음.)

◆‘12·12’의 시작, 전두환과 하나회의 두각

영화에서 전두광과 노태건(노태우)은 자신을 따르는 선·후배 군인(신군부)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군대에서 공적 명령체계를 무시하고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무력을 동원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핵심 사조직이 ‘하나회’다. 

하나회는 철저한 점조직 형태로 운영됐다. 이러다보니 비하나회 군인들은 물론, 하나회 내부 회원들도 누가 하나회 출신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영화에서도 전두광이 홀로 하나회 후배를 만나 가입을 확정짓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회의 비밀성을 보여주는 장치다. 전두광이 반란을 망설이는 노태건을 설득하며 육사생도 행진을 언급하고 그 후부터 자신은 박정희 대통령에 충성했다고 강조하는 장면도 눈에 띈다. 이는 실제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전두환이 벌인 육사생도 행진사건을 가리킨다. 전두환은 5·16 군사정변에 대한 사회 전반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해 지지 행진을 벌인다.
이 일로 전두환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총애를 받게된다. 전두환은 육사 11기 동기들 중 가장 먼저 대령과 ‘별’(준장)을 달았으며, 이른바 ‘알짜 보직’을 두루 거쳤다. 10.26사건이 일어나기 7개월전인 1979년 3월, 박 대통령은 전두환을 군내 최요직 중 하나인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렇게 출세의 길을 걸은 전두환은 자신이 가진 힘과 로비를 통해 하나회 맴버들을 군내 요직에 배치한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전두환을 군부 내 자신의 충성 세력으로 두었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하나회의 존재를 몰랐을리 없으며 심지어 활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뒷받침할 만한 물적 증거는 없지만 박 대통령이 하나회를 묵시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비호했다는 정황은 1973년 윤필용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은 1973년 4월 숙청당한다.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술자리에서 후계자로 이후락을 거론 한 것이 박 대통령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격노한 박 대통령이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수사를 지시, 윤필용은 구속된다.

강창성은 수사과정에서 하나회의 실체는 물론 윤필용이 후원자 중 한 명이란 걸 알게된다. 이 때 하나회 창설멤버이자 윤필용의 참모장이었던 손영길을 비롯, 다수의 하나회 장교들이 군복을 벗는다. 하지만 조직의 정점에 있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숙청 대상에서 제외된다.
강창성은 후일 자신이 쓴 ‘일본, 한국 군벌정치’에서 “윤필용 장군 사건과 함께 착수됐던 하나회 사건 수사는 하나회의 실질적인 후원자였던 박 대통령의 무언의 압력으로 불완전한 선에서 매듭지어지게 됐다”며 “윤 장군 사건에서 전두환이 살아남은 것은 (하나회의 후원자인) 박종규 경호실장이 건재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고 기록했다.

역사에서나 영화에서나 하나회가 군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압군인 육군본부보다 주도면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베트남전서 파티”… 인맥에 관심 컸던 전두환

1969년 육사 동기 중 가장 먼저 대령 계급장을 단 전두환은 1970년 육군 제9보병사단(백마부대) 제29보병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연대장 이상 장교들은 큰 문제가 없으면 귀국한 후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전두환도 이 훈장을 받았는데, 강창성은 책에서 이 과정에서 반대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전두환의 상관이었던 조천성 9사단장과 주월 한국군 사령관 이세호가 훈장 수여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강창성은 책에서 훈장 반대 사유에 대해 “지휘능력의 결함은 물론이고 전공도 적었지만 연대장 부임 후부터 너무 빈번하게 파티를 벌인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됐다는 후문이다”라고 썼다. 또 연대장 재직시절 고위장성과 민간인 등 외부 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와 이들을 응대하느라 작전지휘권을 종종 참모진에 위임했다는 9사단 참모의 증언을 소개했고, “가뭄이 극심해서 장병들은 식수난을 겪고 있는데 자신(전두환)은 식수로 샤워를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타임지가 이것이 사실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고 기록했다. 전두환은 이후 1974년에 준장으로 진급한다. 
그런데 전두환이 베트남에 있던 이 시기에 같이 있다가 12·12 군사반란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호위하다가 반란군의 총격에 맞아 순직한 김오랑 소령(이후 중령 추서)이다. 영화에서는 정해인이 오진호 소령이라는 이름으로 연기한다. 김오랑은 중위시절이던 1970년 7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김오랑은 맹호부대, 전두환은 백마부대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베트남에서 안면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전두환과 장태완의 불편한 만남… 육사와 갑종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의 반란군과 대립하는 군인으로 나오는 이태신(정우성) 수도경비사령관, 김준엽(김성균) 육군본부 현병감, 공수혁(정만식) 특전사령관 중 이태신과 김준엽의 모태가 되는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은 흔히 갑종으로 불리는,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이다.

영화에선 전두광과 노태건이 갑종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갑종은 육군 초창기 초급 장교 양성을 위해 만든 제도로 1950년부터 1969년까지 운영됐다. 약 6개월동안 교육을 거쳐 초급 장교를 양성했기 때문에 육사에 비해 기수가 많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초급장교로 전선에서 싸운 장교 중 다수가 갑종 출신이다.
장태완은 1950년 6.25 전쟁 이후 임관한 갑종 11기, 김진기는 육사 9기이자 갑종 6기 이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갑종 출신 장교들이 많았고, 장성도 자주 배출했다. 
이들과 대립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육사 11기다. 하필이면 육사 11기가 하나회의 주축이 된 건, 이전 기수와 달리 4년제 교육을 받은 첫 정규 사관생도 기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언급되듯 공부는 잘 했지만 먹고 살기 힘들어 육사에 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스스로를 ‘육사 1기’로 칭하기도 했고,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며 갑종과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역사에 없던 과장과 사라지지 않은 진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전두광과 이태신은 광화문에서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둔채 마주한다. 이태신은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예하 야포단에 경복궁 30경비단 포격을 명령하지만, 국방부 장관이 상황 종결을 명령하면서 결국 전두광의 포로가 된다.

실제 장태완은 가용 병력 모두를 이끌고 경복궁을 향해 출발하기 위해 연병장에 집결한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몇 대의 전차마저 적 편으로 돌아설 것이란 예상이 나왔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상황 종결을 명령하면서 수경사를 떠나지 못하고 전두환 세력에 체포된다. 그가 홀로 행주대교에서 공수부대를 막는 장면도 실제론 없었던 일이다.

반란군과 진압군간의 총격 장면도 여러번 나오는데, 이날 치열한 전투는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사망으로 공식 기록된 군인은 3명 뿐이다.
반란에 성공한 전두환 등은 1979년 12월13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것에 승인하는 서명을 받아낸다. 영화 장면에서 최한규(최규하) 대통령은 재가 서명 중 서류 밑에 시간을 병기한다. 이 결제가 정상호(정승화) 총장 체포 뒤 이뤄진 ‘사후결재’임을 증거로 남긴 것이다. 극 중 대사에서도 사후결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최 대통령의 이 행동은 김영삼정부 시절 이뤄진 전두환·노태우 구속 및 재판 과정에서 법원의 중요한 판결 근거로 사용된다. 현장에 있었던 신현확 총리가 공판과정에서 최 대통령의 이러한 행적을 증언했는데 1996년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에 각각 무기징역 및 징역 17년의 유죄를 판결하면서 이를 주요 증거로 인용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전두환이 12월12일 6시20분 경 국무총리 공관에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에 대한 체포 재가를 요청하였을 때 대통령이 묵시적으로라도 이를 승낙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료가 없고, 오히려 이를 거절하였음을 알 수 있다”며 “대통령이 12월13일 새벽 5시10분 경 정 총장의 체포를 재가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정 총장이 체포되고 반란을 저지 또는 진압하려는 장성들이 제압된 후에 이뤄진 것으로 이는 사후 승낙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적시했다. 결국, 최 대통령이 남긴 몇 글자의 기록이 17년 뒤 신군부 반란행위 심판의 결정적 증거로 작용한 것이다.

이도형 기자, 엄형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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