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유지하라는 다수의 외침, 그러나 그럴 수 있는가 [플랫]
클레어 키건 지음 |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132쪽 | 1만3800원
작은 공동체 사회이자 가톨릭 사회인 1980년대 아일랜드의 소도시 뉴로스. 아내와 다섯 딸을 둔 펄롱은 석탄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이곳에선 조선소가 문을 닫고 강 건너 비료 공장도 해고를 여러 차례나 단행했다. 오래된 회사도 문을 닫았다. ‘빈 주먹’으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펄롱은 혹독한 시기에 그나마 “우린 참 운이 좋지”라는 말을 아내에게 건넨다. 그는 조용히 엎드려 지내며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살길 결심한다. 다섯 딸이 잘 자라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1990년대 초까지 실제 운영된 아일랜드 강제 수용소 사건 소재
비참한 모습으로 감금된 소녀들, 거대한 불법을 맞닥뜨린 소시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 아침, 펄롱이 마주한 장면은 그를 통째로 흔들어놓는다. 석탄을 배달하러 수녀원 창고에 간 그는 엉망진창인 여자 아이들을 본다. 대문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아이들. 다른 아이들은 바닥에 엎드려 광택제 통을 놓고 죽어라고 바닥을 닦고 있었다. 눈에는 흉측한 다래끼가 끼어 있었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놓인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조각이 촘촘히 박혀 있다는 사실에도 놀란다. 며칠 지나 다시 석탄을 배달하러 찾은 창고에는 여자 아이가 또 갇혀 있었다. 여자 아이는 14개월 된 아기의 행방을 물었다. 뒤늦게 온 수녀원장은 뜨거운 차를 내놓으면서도 펄롱이 얼른 돌아가주기를 바라는 눈치를 한껏 풍긴다.
클레어 키건이 전작 <맡겨진 소녀> 이후 11년 만에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내놨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여성을 감금하고 강제노동을 시킨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강제 세탁소(수용소)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막달레나 수용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거대한 불법을 마주한 소시민의 내면 갈등과 이를 묵인해온 공동체의 위선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다. 소설은 펄롱의 이대로 살고 싶은 안온한 마음과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마음 사이의 경계를 담백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폭력적 행위가 묵인될 수 있었던 시민들의 ‘은밀한 공모’도 다른 인물들의 말을 통해 무심하게 드러낸다. 소설은 ‘제 삶을 버텨나가기도 어려운데 소시민으로서 어디까지 사회의 불법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2022년 부커상 후보작이다.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우리 마음속에 갇혀 있는 것을 어떻게 안고 살아가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키건이 부커상 홈페이지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여성혐오나 가톨릭 아일랜드, 경제적 어려움, 부성 또는 보편적인 것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한 것은 아니”라며 “하지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녀와 여성이 수감되어 강제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의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은 수녀원의 실상을 마주한 펄롱의 “마음 한편”을 끈질기게 따라간다.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녀원장과 차를 마시면서도 펄롱은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펄롱은 그렇게 하면 이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불법을 묵인하고 가족을 지켜야 하는 펄롱은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아 나온다. 50파운드 지폐. 아내는 이 돈이면 정육점 외상값을 갚고도 남고 칠면조와 햄도 살 수 있다고 한다. 펄롱은 봉투를 구겨 석탄통에 던져 넣는다. 그는 수녀원장 앞에서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는 것을 괴로워했다. “펄롱을 괴롭힌 건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성탄 전야 미사에서 영성체를 받으러 나가야 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위선이 고통스럽다.
조용한 침묵을 유지하라는 다수의 외침은 소설 속 여러 인물을 통해 ‘상관없음’이라는 단어로 표출된다. 펄롱의 아내는 계속 “그런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고 한다. 생각해봤자 소용없다고도 한다. “생각할수록 울적해지기만 한다고.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식당을 운영하는 이웃 미시즈 케호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면서도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라며 조언과 경고의 말을 내뱉는다. 실제로 막달레나 세탁소는 1767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운영됐다. 2013년에서야 국가 차원의 사과문이 발표됐다. “우리와 상관없다”는 폭력적인 말은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이 아니어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을 외면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안락한 일상을 유지하려면 다수의 침묵에 들어가야 한다. 펄롱은 그러지 않았다. 수녀원장은 우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잖아?”라고 강요하지만 펄롱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이브날 밤, 펄롱은 다시 수녀원을 배회하며 여자 아이를 찾아 데리고 나온다. 여자 아이를 창고에 그대로 두고 와서 겪는 고통이야말로 최악이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시기적 배경은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이다. 크리스마스 몇 주 전부터 시작해 크리스마스이브날까지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는 어쩌면 ‘끝까지’ 영성체를 받지 않았던, 수녀원에서 비록 한 명일지라도 아이를 꺼내온 펄롱이 아닐까 싶다. 소설은 내내 갈등을 겪고 힘겨워하는 주인공을 치밀하게 따라가고, 여러 사람들의 위선을 넌지시 보여주지만 마지막만큼은 한 줄기 희망을 남겨놓는다. 곧 크리스마스니까.
작은 공동체 사회의 암묵을 깨뜨린 펄롱의 앞날은 소설 중간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펄롱은 수녀원에서 나와 길가의 노인에게 묻는다. “이 길로 가면 어디로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키건은 여러 인터뷰에서 “조용하고 절제된 문장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의 절제된 문장을 한껏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아일랜드 배우 킬리언 머피가 직접 주연과 제작을 맡아 영화로도 만들고 있다.
▼ 임지선 기자 vision@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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