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의 눈· 귀 가리는 ‘정보왜곡’ 중증… ‘권력의 癌’ 국정 파탄 내몬다[허민의 정치카페]
엑스포 예고된 패배, 대통령만 몰라… 번번이 오염된 정보·가짜뉴스로 尹의 판단 흐리게
총선 앞두고 “문제 없다” 왜곡 계속되면 재앙… 비서실장 문책하고 보고체계 혁신해야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전의 예고된 패배, 대통령만 몰랐다. 발표 하루 전까지 윤석열 대통령에게 ‘유치 가능’이라는 보고가 올라갔다. ‘오염된 정보,’ 즉 ‘가짜뉴스’였다.
예상 밖 완패에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지난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때도 그랬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정보 왜곡이 이미 중증에 가깝다. 정보 왜곡은 나라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자 ‘권력의 암’이다. 4개월 앞으로 닥친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도 왜곡이 계속된다면 여권은 파멸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만 몰랐다
엑스포 유치국 선정을 위한 표결(11월 29일)이 이뤄지기 6일 전, 기자는 여권 주요 관계자 A 씨와 만났다. 투표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느냐는 질문에 A 씨는 “사우디가 1차 투표에서 이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알 만한 사람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산(한국)이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에 크게 패할 수 있다는 분석은 오래전부터 나왔다. 최근 몇 달 동안 접촉한 여권이나 정부, 기업 쪽 인사들은 대부분 한국의 승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입을 모았다.
표결 전 해외 언론 등을 통해 확보한 자료를 보면 사우디가 공개 지지 성명을 받아낸 회원국 수는 122개국이었다. 투표 결과, 그중 119개국이 실제 사우디에 표를 던졌다. 일부 회원국이 투표에 불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우디 지지 국가 현황은 수미일관했다. 그만큼 예측 가능한 정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대통령만 몰랐다. 윤 대통령은 투표 당일까지도 승리 가능성에 기대를 가졌다. 1차 투표에서 부산을 지지하겠다고 한 국가가 50개국을 넘을 것이라는 허위 정보, 1차에서 결판이 안 날 것인 만큼 2차 투표로 갈 것이라는 왜곡 정보, 1차 투표 때엔 로마(이탈리아)나 리야드를 찍은 유럽연합(EU)과 아프리카·중남미 국가 다수가 2차에서는 부산을 찍을 것이라는 조작 정보가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윤 대통령에게 ‘현타’가 찾아온 건 표결 당일 사우디의 조기 압승 소식이 뉴스를 타고 전해진 순간이었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제 부족과 부덕의 소치”라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는 오후 일정을 취소했다. 다음 날인 30일에도 외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대 밖 완패에 단단히 충격을 받았다.
◇대면보고의 불문율
지난 10월 11일 치러진 강서구청장 보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과 현장에서 일찌감치 여론이 좋지 않다는 보고가 들어갔지만 용산(대통령실)만 가면 흐지부지됐다. 대통령실 내부에서는 “문제없다”는 보고가 진행됐고, ‘윤심’이 실리면서 선거판이 대선처럼 커졌다. 투표일 10여 일 전부터는 두 자릿수대의 패배를 점치는 구체적인 데이터들이 돌았는데, 다 묵살됐다. 대통령의 눈·귀를 가리고 선거에 올인 한 결과는 17%포인트 차의 참패였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보고가 생산될까. 용산 참모나 국무위원들 사이에선 대통령과의 대면(對面)보고 때 몇 가지 금기시되는 불문율이 있다. ‘말대꾸’ 금지, ‘되묻기’ 금지, ‘반론 펴기’ 금지, ‘긴 설명’ 금지, ‘문제 제기’ 금지다. 한마디로 짧게 보고해야 하며 대통령이 싫어할 말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현직 장관 B 씨는 “장관이나 참모들의 불문율은 ‘절대 엉기지 말라’는 말로 요약된다”고 말했다. 대통령에 대한 보고체계가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통령의 눈치만 살피는 참모들의 ‘심기 보좌’ 속에서 팩트와 진실 대신 ①“잘 되어간다” ②“여론이 좋다” ③“별문제없다”와 같은 가짜뉴스가 주입되고,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해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됐다. 엑스포가 ①, 강서구청장 보선은 ②,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수수 논란은 ③에 해당할 것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잘 되고 있다…여론이 좋다…문제없다”면서 혁신 없이도 여당이 승리할 것처럼 윗선에 대한 정보 왜곡을 계속한다면 집권당과 여권에 재앙이 될 것이다. 얼마 전 집권당 일각에서 ‘수도권 위기론’이 터져 나왔을 때 여권 지도부가 ‘해당 행위’로 규정하며 “한배에 탈 수 없다”고 을러댄 일도 있었다.
◇권력의 암
정보 왜곡은 ‘권력의 암’이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방해한다.
노무현 정권 출범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무간사를 맡았던 김병준 교수는 인수위 기간 내내 정보 왜곡의 문제에 천착했다고 회고했다. 김 교수는 2002년 2월 인수위 마지막 전체회의 때 노무현 당선인이 위원들에게 한마디씩 해줄 것을 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권력자의 손에 들어오는 정보가 왜곡되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정보 왜곡을 늘 경계하시라. 정보 왜곡은 권력자들이 무너지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다.”(김병준, ‘대통령 권력’) 김 교수는 “노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일인데도, 또 대통령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인데도 그에 관한 정보가 대통령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왜곡 전달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정보 생산자와 그 최종 소비자인 대통령의 마지막 연결고리는 비서실장이다. 미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크리스 위플은 역대 비서실장들을 인터뷰해 엮은 책 ‘게이트키퍼(The Gatekeepers)’에서 비서실장의 최고 덕목으로 ‘대통령이 듣기 싫어하는 것과 불편한 진실 말하기’를 꼽았다. 비서실장 역할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되는 제임스 베이커의 표현을 빌리면 ‘예스맨’이 아닌 ‘노맨’이 되는 것이다. 비서실장을 게이트키퍼라 부르는 이유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대통령에게 ‘노’라고 할까. ‘노’라고 해야 할 때 ‘예스’라고 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렀나. 집권당 친윤 C 의원은 “오랜 권위주의 문화가 작용한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지금 용산의 보고체계는 누가 봐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당 초선 D 의원은 “비서실장부터 일반 참모에 이르기까지 보고체계 전반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궁궐의 담장 안
조선조 광해가 즉위 원년 과거시험에서 책문(策問)을 내렸다. ‘나라가 처한 위기를 구제하려면.’ 문과에 응시한 조위한이 썼다. “도끼에 맞아 죽을 각오로 말씀드리니, 위기는 궁궐의 담장 안에 있습니다.”(김태완, ‘책문’)
결국 권력의 심부, 궁궐의 담장 안이 문제다. 용산 구중심처에서 누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지를 가려내고 인물과 제도를 혁신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권력도, 국정도, 나라도 어려워진다.
전임기자, 행정학 박사
■ 용어 설명
‘게이트키퍼’의 사전적 의미는 뉴스와 정보를 통제하는 사람. 언론에서는 데스크를 담당하는 사람을 일컬음. 미국에서는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는 비서실장에 대한 별칭.
‘책문’은 왕조시대 때 과거시험에서 임금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내리는 시문(試問). 조선조 당시엔 고급 공무원 선발시험인 대과의 마지막 관문으로, 최종 합격자 등수를 정할 때 사용.
■ 세줄 요약
대통령만 몰랐다 : 엑스포 유치전은 모두가 아는 예고된 패배였는데 대통령만 몰라. 허위 정보, 왜곡 정보, 조작 정보 등 오염된 정보와 가짜뉴스로 대통령의 판단을 흐린 것.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때도 마찬가지였음.
권력의 암 : 정보 왜곡은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막는 병이자 ‘권력의 암’. 대통령에 대한 대면보고의 불문율은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 혁신 없이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할 것처럼 왜곡을 계속하면 여권에 재앙 될 것.
궁궐의 담장 안 : 권력의 심부, 용산 구중심처가 문제.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면 역할을 제대로 안 하는 것. 누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지를 가려내고 인물과 제도를 전면 혁신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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