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된 차별’ 위에 선 집행자들

한겨레 2023. 12. 1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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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을 하루 앞둔 9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75주년 인권궐기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깃발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혜정│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75주년 인권궐기대회에 참여했다. 집회 중간중간 움찔했다. 길 건너 동성애 반대 집회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목과 어깨가 울릴 정도였다. 2주 전 같은 장소에서 열렸던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집회가 떠올랐다. 행사 리허설 때 경찰이 찾아와, 집회 소음기준 문서를 내밀며 기준치를 초과할 것 같다며 스피커 음량을 낮추라 했다. 그런데 그보다 열배는 더 큰 소리로 동성애 혐오 발언과 욕설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계인권선언 75주년을 맞아 어떤 소리는 증폭되고, 어떤 소리는 제한되는 현실이라니….

화면에 세계인권선언 조항이 하나씩 띄워졌고, 무대에서는 이주노동자, 참사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장애인연대, 청소년학생 인권단체 발언이 이어졌다. 인권을 지켜내려는 이들은 이중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실현해야 하는 시민의 기본권을 알리고 요구하는 것이 하나이고, 그것을 요구하는 모습을 감추고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움직임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다른 하나다. 첫번째 싸움도 어렵지만, 한국적 현실에서는 두번째 싸움이 심각하다. 목소리를 내는 존재 자체를 감추고 지우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두번째 싸움을 이끄는 이들은 각 현장의 관리자, 책임자, 집행자들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보신각에서 동성애 혐오 굉음에 둘러싸여 있던 필자는 넥슨, 서울교통공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 재판위원회를 생각했다.

지난달 25일 비공개된 ‘메이플스토리’ 엔젤릭버스터 리마스터 버전의 홍보 애니메이션 갈무리

넥슨은 웬만한 이들은 다 아는 거대 게임회사다. 일부 유저들이 이 회사 홍보영상 속 ‘집게 손’ 장면을 발굴해서는 ①남성을 겨냥하는 심볼을 ②페미니스트들이 ③일부러 넣었으니 ④해고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메이플스토리 엔젤릭버스터 집게 손은 여성이 그리지도 않았고, 개인이 마음대로 넣을 수 없는 구조였다. 문제는 넥슨이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이들 요구를 받아들여 페미니즘 지지를 직원 해고 사유로 수용하고 하청업체를 압박했다는 점이다. 이 회사 김창섭 총괄 디렉터는 입장문에서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차별과 혐오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페미니즘은 오래 누적된 차별과 그로 인한 불평등을 바꾸려는 사상인데, 되레 페미니즘을 낙인찍는 일부 유저 손을 들었다. 소비자의 뜻이라면 따르는 게 기업이라는 논리도 있지만, 직원의 노동권 보호 법규와 민원 대응 절차를 뛰어넘는 행태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와 여성에 대한 혐오가 수익이 되는 온라인게임 문화를 심화시킨 책임은 명백하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시청역으로 다시 들어가려다 제지당하자 항의하고 있다. 박 대표는 이날 시청역 승강장에서 ‘서울시 권리중심일자리 연계사업 폐지 규탄 전국결의대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퇴거 요청을 받았다. 연합뉴스

서울교통공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선전전은 물론 침묵시위까지 막고 있다. 세계 장애인의 날 전국결의대회가 열린 지난 11월30일 서울 여의도에서 혜화역으로 향하던 전장연이 시청역에서 발언하려 하자, 경찰은 다섯겹으로 이들을 둘러쌌다. 승강장에서는 “지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불법집회가 있으니 무정차할 수도 있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집회를 연 것도 아니고, 오히려 승강장을 가득 메운 경찰과 지하철 보안관이 시민들 통행을 방해했는데도 무정차 피해를 전장연에 미루는 것처럼 시민들에게 선전했다. 전장연 활동가들을 막고 선 최영도 서울교통공사 고객안전지원센터장은 고성을 내질렀다.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이동권 개선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낙인찍고 그들에게는 그 어떤 폭력적인 행위를 해도 문제가 안 되는 것처럼 승인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이동환 목사가 지난 8일 경기 안양시 대한감리회 경기연회 사무실에서 열린 종교재판 선고에서 출교 징계를 받은 뒤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준희 기자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 재판위원회는 12월8일 성소수자에게 축복기도를 한 이동환 목사를 출교조치했다.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목사와 신도의 자리를 아예 없앤 것이다.

이 사안에 일부는 집게 손은 성기 크기를 비하해 남성 유저들에 대한 ‘혐오’이고, 장애인 이동권 보장 선전전은 지하철 탑승자들을 방해한 ‘침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명은 이 상황을 불러온 ‘누적된 차별’과 ‘그로 인한 불평등’이라는 현실은 소거한다. 결국 ‘상호 간의 불편’, ‘상호 간의 혐오’를 거쳐 ‘다수의 편의’가 남는다. 수익과 다수의 논리에 의해 차별과 불평등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은 배제된다.

이제 ‘누적된 차별’ 위에 선 집행자들에게 질문하고 요구해야 한다. 여성 애니메이터, 전장연, 이동환 목사가 하고 있는 싸움이다. 차별과 혐오의 소음이 증폭되는 자리이기에 온몸이 아프겠지만, 소음을 뚫고 나오는 인권의 목소리는 치유적이고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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