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숨은 명산] 외딴 기차역에 내려…아무도 모르게 산에 들다

김재준 '한국유산기' 작가 입력 2023. 12. 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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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배바위산
배바위산에서 바라본 겨울 산하, 멀리 강기슭이 산타마을 분천역이다.

강물 위에 햇살이 내려앉아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아침, 바람은 낙엽을 쓸어 몰고 다닌다. 크고 작은 바위를 가르며 흘러가는 강물은 막히면 돌아서 흐르고 얕으면 채워서 간다. 겨울답지 않은 흐릿한 날씨에 바람도 차갑지 않다. 아침 9시 승부역에는 광산촌 으스름 빛이 남아 있다. 철길을 두고 낙동강 건너 숲으로 올라가는 산길에는 향기로운 숲의 냄새. 계절은 겨울로 들었지만 떠나기 싫은 듯 남은 가을은 붉다. '물소리에 귀를 씻고 물처럼 흐르며 살리라' 사설을 늘어놓는데 일행은 물난리에 한가하게 무슨 상선약수上善若水 타령이냐고 대뜸 반격해 온다. 올라가는 길은 여기저기 집중호우 피해의 흔적이 역력하다.

배바위산은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의 해발 968m, 산 모양이 배처럼 생겨서 불리는듯하다. 정상으로 가는 능선에서 낙동강 줄기와 통고산, 횡악산, 죽미산, 장군봉, 일월산 등 여러 산군山群을 조망할 수 있다. 주변은 대부분 소나무·참나무숲의 1,000m급 높은 산이다. 산 아래로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다. 승부역에서 강 건너 배바위재를 거쳐 정상, 비룡산을 연결해 많이 오르지만, 배바위산에서 승부·분천역 중간지점 강 아래로 내려서 강줄기 따라 걷는 것도 색다른 맛이다. 다만 이 구간은 등산로가 불분명해서 길을 잃을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원점회귀 산행 9.7km·5시간 정도 걸린다.

배바위산 등산길, 승부역에서 시작된다.

오전 9시 30분 개울을 건너며 미끄러질까 조심해서 내딛는데 관중은 아직도 푸른 기세를 뽐내며 커다란 잎을 열어젖혔다. 신갈나무와 엄나무는 노란색 잎을 달고 당단풍·홍단풍·청단풍, 만산홍엽은 어느덧 빛이 바래지고 있다. 하늘에서 나뭇잎 우수수 날리며 떨어지고, 발밑에는 단풍잎 수북이 쌓여 바스락거리며 발걸음 더디게 한다. 구르몽의 '낙엽'이나 이브 몽탕의 '고엽',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나는 산길이다. 요즘은 숲속의 두 갈래 길 가운데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모든 것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넓은 산길을 걷는데 안내판에서 잠시 선다. '벌목 길'은 나무를 베어 운반하던 길로 예전에는 '산판길'이라 불렀다. 경사가 급하고 굴곡이 심한 울퉁불퉁한 비포장에 나무를 싣고 '재무시' 트럭이 다녔다. 지엠씨GMC(General Motors Company)의 일본식 발음. 산림을 황폐시키기도 했으나 산림경영·산불방지에 필수다. 지금은 산골 마을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등산과 산림휴양 기능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는 바람 소리에 묻히는 듯하더니 이내 물소리에 섞여 흘러간다. 굴피·오동·광대싸리·층층·신갈나무 이파리는 산길에 떨어져 날리고, 빈 가지에 달린 자주색 알맹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작살나무 열매다. 10시부터 본격적인 등산길, 군데군데 수해 피해로 올라가기 불편하다. 발아래 잣나무 씨앗이 뒹굴고 산수국·까치박달·느티나무. 저만치 낙동정맥 등산로 안내 표지(배바위고개 1.1·승부역 1.7km)가 보인다.

등산로 입구, 배바위재까지 길이 넓다.

산판길과 울진·삼척 무장공비

절벽 같은 산그늘을 벗어나니 햇살이 비치고 까마귀 소리 요란한데 올려다보면 하늘이 파랗고 구름은 더욱 희다. 작은 고원지대에 다다르니 10시 10분. 산뽕나무, 생강나무 이파리는 축축 늘어져 색깔이 우중충하다. 어제 기온 29℃, 들쭉날쭉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어떻게 단풍이 고울 수 있겠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이 세상 하직하기도 어렵다. 사람도 병들면 요양원에서 죽어야 하는 현실이 붉게 물들지 못한 어설픈 나뭇잎 같다. 최저기온 5℃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단풍이 드는데 평지보다 산, 강수량 적은 곳, 양지바른 곳에서 색깔이 아름답게 나타난다. 곧바로 화전민 터 뽕나무골. 긴 나무계단 길을 올라 해발 808m 배바위 고개 쉼터(배바위산0.7·승부역 2.7·분천역 7.2km) 능선 10시 20분. 이곳은 '울진·삼척 무장공비 이동통로'라고 씌었다.

1968년 10월 30일~11월 2일까지 공비 120명이 상륙, 울진·삼척·봉화·강릉·정선 등지로 침투한다. 총칼로 협박해 사람들을 대검으로, 아이와 일가족까지 잔인하게 죽였다. 당시 열 살이던 평창 이승복 어린이가 처참하게 죽은 것도 이때. 공비 대다수를 사살했지만 민간인 피해도 수십 명에 달했다. 무장공비들이 화전민으로부터 식량과 정보를 받거나 은신처가 될 것을 우려해 이 무렵 대대적으로 화전민을 산에서 내려오게 했다.

독가촌 뒤로 보이는 배바위산.

우리가 올라온 산 아래쪽에서 '와~옥 와~옥' 고라니 소리 구슬피 들리더니 이내 바람 소리에 묻혀버렸다. 지금까지 올라온 길은 임도 수준으로 쉬웠지만 능선길은 바람에 쌓인 낙엽이 길을 덮어 애를 먹는다. 신갈·소나무림 가파른 길, 낙엽 아래 묻힌 바윗돌 조심해서 딛는다. 험준한 산속의 바람 소리 거세고 두꺼운 진달래 이파리는 붉은 물이 곱게 들었다. 우리는 잠시 스쳐 지나지만 여기 서서 자라는 나무들은 솔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도 무서울 것이다. 떨고 있는 노란 피나무 이파리 애처롭다.

올라가며 뒤돌아보니 건너편 비룡산 코앞까지 임도가 뚫려 뱀처럼 구불구불 지나가고 산불진압훈련을 하는지 헬기 소리 요란하다. 오른쪽 멀리 바라보면 산자락 끝으로 분천역이 보이고, 낙동강 줄기와 어우러진 겨울 산하, 통고산·횡악산·죽미산·장군봉·일월산…. 첩첩이 둘러친 산들의 파노라마, 바다의 물결이다. 소나무·참나무, 바위와 바람이 이 산의 주인.

강바람, 산바람, 철길 따라 걷는 길.

배바위산 의미와 강줄기 따라가는 승부역

쉼터에서 정상까지 740m 거리가 꽤 멀게 느껴졌다. 11시 배바위산 정상에는 해발 968m 나무 팻말. 산 모양이 마치 배船처럼 생겨 배바위산, 한자로 선암산船巖山이다. 조계산, 문학산, 화왕산, 선암산 등지에 배바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장차 바닷물이 산으로 밀려올 것을 선인들이 예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노아의 방주나 반야용선盤若龍船으로 피안의 세계로 가려는 염원이 아니었을까? 저 멀리 굽어보면 용이 꿈틀거리듯 강물이 흘러가니 여기가 대웅大雄이요 용선龍船일 것이다.

왼쪽 각금굴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 법한데 낙엽이 쌓여 어디가 길인지, 절벽인지 땅인지, 분간 안 된다. 망설이다 그대로 직진해서 왼쪽 계곡으로 틀기로 했다. 바위 따라 내려가는 길, 물푸레·진달래·철쭉·노린재·신갈·소나무. 15분가량 지나 능선길에서 신갈나무를 만난다. 얼마나 굵고 큰지 처음 보는 거목이다.

강너머 산에는 임도가 길게 지나가고 풍력발전기까지 자리 잡았다. 이 무인지경에 무장공비가 출몰할 것 같은 능선, 어림잡아 걷는 곳이 불분명해도 짐승들이 다닌 흔적을 찾아 내려간다. 미끄러지고 엎어지고 넘어지며 밀림의 탐험대처럼 유격하듯 진행하는데 나뭇가지는 배낭을 붙잡고 늘어진다. 박달·신갈·겨우살이·물푸레·쇠물푸레·소나무. 어느덧 발아래 강물이 보이는데 산 그림자 길게 늘어져 계곡까지 먼저 내려갔다.

배바위산 정상.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숲'에서나 볼 법한 이끼의 숲. 칡·다래 덩굴이 구불구불 하늘을 감싸 어지럽고 바위에 이끼가 붙어 사는 곰팡내 나는 곳이다. 정오 지난 12시 15분 긴 계곡 밀림을 헤치며 가는데 나래회나무 닮은 군락지, 누리장나무의 검붉은 깍지 열매다. 관중·다래·산뽕·잣나무 지대 지나 화전민 터에 닿는다. 식수용 호스를 보니 거의 내려온 것이다. 호스 따라 5분가량 더 가서 산중에 외딴집이 있는데 인기척이 없다. 어림잡아도 정통으로 내려왔으니 다행이다. 두 번째 집을 지나고 드디어 낙동강 걷는 길(양원 3.3·승부 3.2km)이다.

철로 아래 내려서 강 따라 걷는 길. 오후 1시경 철길의 강변에 앉아 옷에 붙은 도깨비바늘을 털고 신발까지 벗었다. 땀에 엉킨 머리칼 넘기며 강바람에 목을 축인다. 맞은편 절벽에 물든 나무들은 아직도 만산홍엽인데 물소리, 바람 소리. 잠시나마 물외한인物外閒人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두 갈래 길 가운데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순간의 기쁨도 없었을 것이다. 예정에 없는 덤이라 했더니, 골탕이지 뭐가 덤이냐고 투덜댄다. 때로는 모험과 일탈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

휴대폰 불통 지대였는데 갑자기 뭐가 막 날아온다. 불필요한 일상의 메시지. 자연과 문명의 사이, 철길과 강 사이를 걷는 우리. 강가에는 남은 쑥부쟁이와 노란 산쑥꽃이 폈고 가는 쑥은 말라비틀어졌다. 빨간 단풍나무 잎과 신갈나무 노란 이파리. 우람한 바위마다 낙락장송에 걸린 하얀 구름, 하늘은 푸르고 강물 위로 단풍이 둥둥 떠내려간다. 산간 철길 따라 적막을 흔드는 물소리. 오후 1시 10분 '낙동강 세평 하늘길 각금 구간'(양원역3.2·승부역 2.5km)을 지난다. 이정표 거리가 좀 이상해도 강 따라 30분 더 걸어서 닮은 부부를 만났다. 분천역까지 걷는데 낙동강 길은 주변 경치가 뛰어나 눈이 즐겁다고 말한다.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어떤 역무원이 썼다는 표석을 마주한다. 오후 2시경 승부역에 되돌아왔다. 나뭇잎 헤치고 산을 오르는 입김처럼 기적소리 닿은 산간 역, 잎새 지면 다시 떠나고 더러는 잊히고. 건널목엔 기다리는 사람 없이 바람만 머무는데, 산 그림자는 기차보다 더 길게 누워 있다.

승부承富역, 부를 잇는다는 뜻이다.

산행길잡이

승부역 ­ 강 건너 등산로 입구 → 산판길 ­ 화전민 터 → 배바위재 → 배바위산 정상 → 배바위산 동남 능선 → 계곡 → 독가촌 → 낙동강 세평 하늘 길 → 승부역(원점회귀)

※ 왕복 16km·5시간 정도

낙동정맥트레일 2구간(9.9km) : 승부역~배바위 고개~비동마을~분천역

교통

중앙고속도로 영주 또는 풍기IC(하차) → 자동차 전용도로 (봉화·태백 방면) → 소천면(태백 방면) → 석포면 승부역

※ 내비게이션 : 경북 봉화군 석포면 승부길 1162-5 (승부리 산105-1)

※ 주변 주차장 무료, 대중교통 불편

숙식

봉화 읍내, 태백 시내 등지에 다양한 식당과 모텔이 많음.

주변 볼거리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소광리 금강소나무 군락지, 분천역, 승부역, 분천리 산타마을(핀란드 로바니에미 산타마을에서 유래, 여름의 성탄절), 백두대간협곡열차(예약 필수) 등.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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