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은 이미 준비돼 있는데…중대재해처벌법 또 유예?

한겨레 2023. 12. 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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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

지난 5일 오후 서울 국회 인근에서 ‘중대재해처벌법 개악 중단 촉구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열려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국회의 중대재해처벌법 개악 시도를 규탄하며 50인 미만 기업에 대한 2년 유예안을 즉각 폐기할 것을 촉구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왜냐면] 정현철 ㅣ ㈔안산노동안전센터 센터장

지난 11월28일 경기도가 운영하는 ‘노동안전지킴이’들과 안산 반월공단의 작은 사업장으로 현장점검을 나갔다. 한 곳은 기계공구를 제조하는 곳으로 전체 직원이 35명이었다. 또 한 곳은 목재 가구공장으로 30여명이 일했다. 노동안전지킴이 한 분이 “지난해 현장점검했을 땐 엉망이었다”고 귀띔해줬다. 하지만 막상 들어선 기계공구업체 현장은 지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말끔했다. 총무부장은 “한 달에 한 번씩 점검업체를 통해 현장 개선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가구공장도 지적할 것이 별로 없었다. “기계를 새로 들이면서 점검업체를 통해 유해 위험 기계·기구 안전점검을 진행했다”고 했다. 이곳도 매달 점검을 받는다고 했다. 내년에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적용할 중대재해처벌법을 현장은 이미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비극적 노동자 사망사고들을 계기로 생명과 안전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노동자와 시민의 힘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 개정했고,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한 뒤 현장에는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반월시화산업단지는 전체 사업장의 90%가 50인 미만 사업장이다. 안전은 항상 뒷전이었고, 노동안전지킴이들이 현장을 방문하면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뒤 노동안전지킴이 방문을 받아들이고 사업장의 유해위험요인을 함께 찾으며 개선하려는 변화가 생겨났다. 현장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흐름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게 정부, 여당과 보수 언론이 아닌가 싶다.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어 보일 뿐, 산업재해를 줄이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언론은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처벌하냐 안 하느냐의 문제만 집중하고 있다. 그로 인해 현장에서는 산업 현장의 안전개선 노력보다는 막연히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이 가득하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어렵게 마련한 안전사회를 위한 제도들을 어떻게 안착시킬지 고민해야 할 때다.

매일 우리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목도한다. 정말 어이없는 사고들이 발생한다. 지게차에 후미등과 경보장치를 안 달아서, 건설 현장의 개구부를 막지 않아서, 회전하는 롤러 기계에 방호망을 달지 않아서, 계단에 안전 난간대를 설치하지 않아서, 마모된 슬링 벨트를 사용해서, 호이스트크레인 안전장치(후크에 걸린 물건이 빠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해제하고 사용해서 노동자들이 죽는다. 조금만 신경 쓰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다.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50인 미만의 작은 사업장일수록 안전은 납기일에 밀려 뒷전이다. 그러다 보니 사망사고의 76%가 50인 미만 작은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산업 안전보건 패러다임은 안전보건기술 단계에서 안전보건시스템 단계, 안전문화 단계로 이행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이러한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와 지방정부의 역할이 절실하다. 50인 미만 사업장을 묶어 ‘공동안전관리자’를 두고, 노동안전지킴이를 확대해 사업장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며, 사업장 컨설팅을 통해 위험성 평가가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기업의 인식변화도 필요하다. 기업 규모가 작다고 품질경영시스템 도입을 유보하는 회사는 없다. 회사에 품질경영시스템을 도입하듯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주요 내용은 산업안전보건법의 핵심 조항들을 가져온 것이다. 지금 기업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유보해 달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산업안전보건법을 안 지켰다는 자기 고백이며 노동부나 사법부도 자기 역할을 방기했다는 방증이다. 우리 사회가 안전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중대재해처벌법은 현장에 더욱 확고히 뿌리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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