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광장] 겨울의 정취, 눈에 대한 단상

정용기 시인 2023. 12. 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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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기 시인

지난 7일이 절기상으로 1년 중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대설'이었다. 겨울이 되고 추위가 찾아오면, 밖에만 나가도 무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던 한여름이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계절에 따라 문화가 다양하고 사람들이 느끼는 감성도 달라진다. 겨울의 정취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눈이다. 추위 속에서는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지만, 눈이 내리면 설렘으로 마음은 부풀기도 한다.

필자가 읽은 문학 작품 중에서 눈에 대한 감성을 키워준 작품들이 더러 있었다. 1980년대에 독자들은 이청준과 이문열의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청준의 '눈길'에서는, 도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집에 들렀던 아들을 차부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눈길에 아들의 발자국을 하나하나 되짚어 돌아오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 주지 못한다고 어머니를 은근히 원망하고 있던 아들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의 순수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데, 눈길을 배경으로 어머니와 아들이 화해에 이르는 과정이 꽤나 감동적이었다.

2000년대를 전후해 소설가 이문열이 보수성 짙은 발언으로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많은 독자들이 실망감을 느끼고 '책 장례식'까지 치렀던 적이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 한창 인기를 누리던 시절에 읽었던 그의 장편소설 '젊은 날의 초상'은,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던 나에게 작가의 성향을 떠나서 강하게 다가왔다. 주인공은 다니던 학교를 떠나서 산골에서 불목하니로 살다가 죽을 각오를 하고 바다를 목적지로 삼아 해발 700m의 눈 덮인 창수령을 넘는데, 주인공의 기나긴 방황과 정신적인 고뇌마저도 아름답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작품 속 그 장엄한 설경 때문일 것이다. 대학 졸업 직후에 친구 세 명과 함께 떠난 며칠 간의 도보 여행에서 경상북도 봉화인지 울진인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노루목이라는 고개를 넘다가, 쌓였던 눈이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것처럼 녹아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창수령을 떠올렸다.

박용래의 시 '저녁눈'도 빼놓을 수 없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동일한 주어와 서술어에 부사어만 바뀌면서, 단 네 줄로 저녁 무렵 눈 내리는 시골 마을의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어지럽게 휘날리는 눈발을 표현한 '붐비다'라는 동사가 절묘하게 느껴졌다. 고향을 떠나 대전에서 20대를 보내면서 겨울에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족들과 고향집 사랑방의 뜨끈뜨끈한 구들방이 진정으로 그리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은 이렇게 시작한다. 함박눈이 푸짐하게 내린 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신비로운 풍경을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고 표현한 문장 하나만으로 이 소설이 나를 사로잡았던 기억이 난다. 또 김광균의 시 '설야'에서는, 들릴 듯 안 들릴 듯 밤눈 내리는 정경을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표현했다. 관능을 넘어서는 절창으로, 한 시인의 명성이 한 작품 혹은 한 문장으로 독자의 기억 속에서 오래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스무 살 무렵 고향 마을에서 함박눈이 내린 밤 풍경을 보고, 펼쳐 놓은 여인네의 치맛자락을 떠올린 것도 김광균의 '설야' 때문일 것이다. 소나무에 쌓인 눈의 무게를 버티다가 이기지 못하면 가지가 부러지곤 했다. 이상국 시인은 '대결'이라는 시에서 이것을 "저 빛나는 자해自害/ 혹은 아름다운 마감"이라고 표현했는데, 고향 마을에서 눈 쌓인 고요한 밤에 유난히 크게 들리던 그 소리를 들을 때면 우주의 비밀스러운 숨결을 만나는 듯했다. 눈의 무게 때문에 가지를 내려놓던 소나무는 옹이를 맺어서 아름다운 무늬로 그 겨울밤을 몸에 새기고 있을 것이다. 설해목 소리를 듣던 스무 살 무렵으로 이제 돌아갈 수 없다. 눈이 내리면 교통체증과 빙판길 출퇴근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눈 내릴 때 설레던 그 정갈한 감성을 되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정용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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