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디알로고] “개도국 R&D 정책서 벗어나야 세계 최초·최고 연구할 수 있다”
”논문·특허 수만 따지니 단기 실적에만 치중
답 없는 문제 연구해야 세계 이끌 수 있어
과제 내면서 연구범위 정하면 카르텔 생겨
문제만 정확히 제시하면 다양한 아이디어 나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32년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란 책에서 당시 주류 이론이던 천동설을 배격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갈릴레이의 ‘디알로고(Dialogo·대화)’처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1966년 미국의 원조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종합 과학기술 연구소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65년 우리 정부에 1000만달러를 지원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이 한국의 미래”라며 원조금에 정부 예산 1000만달러를 더 보태서 과학기술 연구소 건립을 지시했다.
KIST는 이후 국산 1호 컴퓨터, 자동차와 반도체 원천기술 등을 개발하며 한국의 산업화와 과학 연구를 선도했다. 포항제철소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전자공업 육성 계획을 세워 반도체와 통신장비 개발의 토대를 닦은 것도 KIST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금지 약물 복용 여부를 알아내는 첨단 도핑 분석 기술을 지원했다.
윤석진(尹錫珍·64) KIST 원장은 지난 2020년 비(非) 서울대 토종 과학자 출신으로 처음 KIST 수장에 올랐다. 그는 KIST가 과거처럼 한국 과학을 이끌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대대적인 혁신을 단행했다. 대표적으로 연구원들이 논문 건수에만 연연하지 않도록 평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꿨다. 지난 4일 KIST에서 만난 윤 원장은 “답이 없는 연구, 불가능한 연구를 하느라 논문이나 특허를 내지 못해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며 “우리도 세계 최고, 세계 최초의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 연구하려면 양적 평가에서 벗어나야
–지난 7월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을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윤 원장의 재선임안을 부결시켰다. 기관평가에서 25개 출연연 중 유일하게 ‘매우 우수’ 등급을 받고도 연임에 실패했다.
“KIST는 전임 원장 때도 ‘매우 우수’ 등급을 받았지만, 당시 평가는 연구개발이 주였고 이번은 경영만 본 것이다. 기관장으로서 경영 성과를 인정받고도 탈락해 아쉬웠지만 승복했다.”
–지난 3년간 경영에서 어떤 일을 했길래 최고 평가를 받았나.
“혁신으로 판을 바꿨다. KIST가 그동안 잘 했지만, 세계 최고, 세계 최초 연구를 한 것은 아니잖나. 박사후연구원 시절 지도 교수의 연구를 이어받아 적절하게 기업의 수요에 대응한 거다. 이제는 KIST가 세계를 이끌 연구를 해서 한국 과학기술의 혁신에 길라잡이가 돼보자고 했다.”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다고 보는지.
“연구자 평가를 최고 등급인 S부터 A~D 5단계이던 걸 S·A·D 3등급으로 간소화했다. 출연연은 그동안 논문이나 특허 수 같은 정량 평가에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수를 늘리기 위해 단기 실적에 치중했다. 타율 생각하느라 삼진 가능성이 큰 홈런 칠 생각 안 하고 안타만 노리는 것과 같았다. KIST는 분야 특성을 인정하는 수월성 평가를 해서 답이 없는 연구, 불가능해 보이는 연구를 해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평가제도를 바꾸고 어떤 성과가 있었나.
“논문·특허의 양적 증가보다 질적 수준 향상으로 전환됐다. 논문 수는 조금 떨어졌지만 좋은 저널에 내는 수는 크게 늘었다. 5년간 책임급 승격률이 21%에 그칠 정도로 심사가 엄격했지만, 연구자 만족도는 더 높아졌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과정을 수학으로 예측한 연구는 예전 같으면 명함도 못 내밀었겠지만, 지금은 KIST 최고상을 주는 데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KIST가 출연연의 맏형이지만 이제는 전문연구기관들이 많아졌다.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KIST는 ‘빅사이언스(Big Science)’를 해야 한다. 기술에 비중을 주면 다른 연구소와 겹칠 수 있다. 과학에 치중하면 기초과학연구원(IBS) 같은 곳과 차별되지 않는다. KIST는 기초와 응용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를 해야 한다. 뇌를 모방한 반도체나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 뇌 연구 같은 걸 해야 한다.”
◇난제에 도전해야 세계 최초 연구 가능
–실제로 KIST의 연구 내용은 과거 출연연이 하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났다.
“초고난도 연구에 도전하는 ‘그랜드 챌린지(GRaND Challenge)’를 시작했다. 그랜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국가에 헌신하는(Globally Recognized and Nationally Dedicating)’이란 뜻의 영문 약자이다. 자폐 진단과 치료, 노화 제어, 시각 복원, 바르는 태양전지, 췌장암 치료, 전도성 목재 등 6가지 도전과제를 선정했다. 모두 인류와 국가의 당면 과제인 질병과 노화, 에너지, 기후변화 문제에 바로 도전하는 것이다.”
–KIST 연구진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출연연은 기업이나 대학이 뛰어들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미항공우주국(NASA)이 과거 아폴로 프로그램을 추진할 때 대학, 기업에서 개발된 다양한 기술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엮어냈듯, KIST가 대학, 기업과의 협력에서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
–KIST에 기업 연구자들도 있다는데.
“LG화학, 포스코 등 대기업들과 KIST의 원천기술로 탄소 중립, 기후변화에 대응할 신산업을 개척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기업과 공동연구실도 마련했다. 대학 연구자들과 공동 연구도 활발하다. 양자컴퓨팅연구소는 한양대 교수가 프로젝트 책임자로 일주일에 3~4일씩 KIST에 온다.”
–KIST에서 스타트업 오디션 대회를 열고 지원까지 한다고 들었다.
“민간 투자기관(VC)이 창업팀 선발에서 교육, 투자까지 참여하는 오디션 방식의 창업학교 프로그램(GRaND-K)을 만들었다. 투자기관과 창업팀을 1대 1로 연결해 성공 비결을 전수했다. KIST 연구자의 창업 겸직, 휴직 기간을 3년에서 겸직 2+2년, 휴직 2년으로 개선해 창업 동기부여를 강화했다.”
◇개도국 수준 과학정책은 이제 한계
–지금 한국의 과학은 어느 단계에 있다고 보나.
“개발도상국에 맞는 연구개발(R&D) 정책을 개선하면서 지금까지 가져왔다. K팝처럼 한국적인 R&D 정책으로 선진국을 빠르게 추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제는 추격으로는 안 되고 선도자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개도국 정책으로는 안 된다. 연구 과제 발굴, 기획부터 평가까지 모든 걸 새롭게 해야 한다.”
–세계 과학을 이끄는 미국 방식으로 가야 하나.
“미국은 PM(Project Manager, 과제책임자)들이 전권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한다. 연구역량이나 행정력을 인정받는 연구자들이 많아 PM을 찾기 쉽다. 우리는 그만한 인력이 부족하다. 게다가 3년쯤 지나 실적 없다고 비판하고, 또 정권 바뀌면 물갈이 운운하니 PM이 힘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우리만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KIST에서 개인 평가하는 문화는 바꿨지만, 아직 시스템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최근 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하면서 과학계의 카르텔을 비판했다. 그런 비판을 받을 만했다. R&D 기획을 할 때 끼리끼리 모이기 때문이다.”
–과제 기획부터 연구자가 한정된다는 말인가.
“연구 과제를 발주하면서 제안요청서(RFP, Request For Proposal)를 제시하는 게 문제다. 3D(입체) 프린터 과제를 내면서 재료를 금속으로 한다는 식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이렇게 답을 정해놓고 문제를 내면 참여할 사람이 뻔히 정해진다. 그러지 말고 왜 연구를 하는지 방향만 제시해야 한다. 3D 프린터의 효율 향상이 목표라든지, 아니면 양산에 적합하다든지 하면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뛰어들 것이다.”
–RFP 대신 문제 정의서를 주자고 했다. 어떤 개념인가.
“미세먼지 때문에 국민 생활이 이렇게 저렇게 나빠진다. 미세먼지를 절감할 방법을 고민해보자. 이런 게 문제 정의서이다. 문제를 주면 연구자들이 다양하게 풀 것이다. 내가 출연연을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 있을 때 시도한 것이다.”
◇대학, 기업 넘어 국민, 사회와 협력도 필수
–KIST는 지난 3월 출연연 중 처음으로 공익재단인 KIST미래재단을 설립했다. 대학도 아닌 출연연이 기부금을 받는 재단을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재단은 지난 2012년부터 KIST 직원 400여명이 연봉 1%씩을 기부해 모은 14억9000만원을 기반으로 시작했다. 그동안 KT&G 장학재단과 이든앤앨리스 마케팅, 포스코그룹 등으로부터 후원 약정을 받았다. 교수나 기업 연구원이 정년 때문에 연구를 중단하는 게 안타까웠다. 재단은 기부금을 국내외 대학·기업의 석학급교수·연구원을 유치하는 데 활용할 계획이다.”
–학문 후속 세대 육성도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맞는 말이다. 미래재단은 박사후연구원들에게 안정적 연구 환경을 마련해주고, 과학고, 영재고 대상 장학사업과 소외지역과 계층에 대한 지원사업, 개발도상국 대학과 연구소와 협력 사업 등에도 기부금을 활용할 계획이다.”
–과학계가 인류가 당면한 난제를 해결하려면 연구자, 연구기관의 융합을 넘어 국민, 사회와도 협력해야 한다고 했는데.
“사회 곳곳에서 기술적 요구사항을 해석하고 그들과 협력해 연구자들이 찾은 답이 적합한지 평가해야 한다. 국민과 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해 실험실과 현장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 연구자에 대한 국민적 지원을 유도할 수 있다.”
☞윤석진 원장
1959년 전북 익산 출생.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전기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냈으며, KIST 박막재료연구센터장과 재료·소자본부장, 미래융합기술연구본부장, 연구기획조정본부장, 부원장을 거쳤다.
윤 원장은 연구원 시절 문제해결형 연구에서 독보적 능력을 입증했다. 2000년대 초 직선 운동이 가능한 초소형 리니어 모터를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어내 디지털카메라에서 상용화시켰다. 당시 기술은 관성의 법칙을 응용한 것인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급제동했을 때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융합연구본부장 시절 100억원 규모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융합연구단 10개, 20억원 규모의 창의형 융합연구과제 20개를 선정해 출연연의 융합연구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KIST 원장 퇴임 후에는 기업이나 지역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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