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무대 오른 한동훈, 이동하는 여권 권력
공식 선언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정치 데뷔다. 지난 11월 한 달간 한동훈 장관의 외부 일정에 대한 정치권 평가다. 한 장관과 법무부는 오래전부터 정해진 법무 정책 현장 점검 차원이라고 밝혔지만 동선과 언행을 종합하면 다른 유력 정치인들의 행보와 견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기점은 11월17일 대구 일정이다. 한 장관은 이날 강력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대구스마일센터’ 등을 방문하고 시민들을 만났다. 전국에 위치한 스마일센터는 총 16곳. 이 가운데 대구 센터를 우선 방문한 것은 보수정당의 텃밭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최근 여권 행보와 맞물린 점도 정치적 행보라는 시선을 받았다. 앞서 11월7일 윤석열 대통령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등이 7개월 만에 대구를 찾았다(2023년 바르게살기운동 전국회원대회 참석 등).
한동훈 장관이 대구 방문에 이어 11월21일 찾은 대전(CBT대전센터, 카이스트 방문)은 현재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이 지역구 7석을 모두 석권한 지역이다. 다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대전 동부 지역(동구·중구·대덕구)은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이, 서부 지역(서구갑·서구을·유성구갑·유성구)은 민주당이 차지했다. 특히 한 장관이 대전 방문에서 “여의도에서 일하는 300명만 쓰는 고유의 어떤 화법이나 문법은 여의도 사투리 아닌가. 저는 나머지 5000만이 쓰는 언어를 쓰겠다”라고 밝히면서 현재 그의 시선이 정치권을 향해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11월24일에는 울산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를 찾았다. 조선소 방문은 올해 두 번째다. 7월 전남 영암의 현대삼호중공업을 방문했다. 조선소는 ‘블루칼라’로 불리는 현장 인력들이 많다. 노동자 민심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는 장소 중 한 곳이라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말이다. 한 장관은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조선소가 인력이 부족해 배를 못 내보내고 있어 안타깝다.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E-7-4(숙련기능인력) 비자 확대 등 인력 공급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최근 수년 사이 조선업계가 겪는 인력난을 짚으며, 자신이 장관 취임 직후부터 법무부 역점 사업으로 추진해온 이민청 설립을 강조했다.
총선을 앞두고 한동훈 장관의 정치 행보가 뚜렷해지면서, 그를 활용한 여러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서울 종로, 강남, 용산 등 출마 지역구를 관측하는 동시에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장 등과 같은 중책을 맡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여권에선 당장 구체적 시나리오를 짜는 건 시기상조라는 말이 나온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한 장관이 출마할 지역구의 경우 지역과 상대에 따라 전체 선거판에 미칠 영향력이 큰 만큼, 민주당이 ‘라인업(공천)’을 끝마친 뒤에 결정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비대위원장 또는 선대위원장 등을 정치 신인인 한 장관에게 맡길 경우 혁신은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정치적 조율 측면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장단점이 갈려 신중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권력 이동의 예고편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한동훈 장관의 이번 정치 행보는 이른 감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히려 총선에서 한 장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출마를 위한 공직 사퇴 시한(1월11일) 직전까지 분위기를 살피거나 선거일 30일 전까지만 공직을 사퇴해도 출마할 수 있는 비례대표에 도전하는 게 더 극적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장관의 등판이 이르다고 주장하는 쪽은 여권, 특히 용산 대통령실에서 급하게 무대에 올렸다고 평가한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과 김기현 대표가 대구를 방문한 것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전후 국정 지지율 하락세가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보였던 TK(대구·경북) ‘다지기’ 측면이 컸다. 그러나 지지율에 큰 변화가 없자, 서둘러 윤석열 정부의 ‘2인자’이자 ‘상징’인 한동훈 장관을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최근 신당 창당 가능성으로 관심을 받는 이준석 전 대표를 견제하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있다. 한 장관이 ‘노골적인’ 정치 행보를 하면서도 총선 출마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 대통령실 또는 국민의힘에서 향후 한 장관의 역할이 무엇인지 함구하고 있다는 점, 낮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동훈 장관에게 부채가 된다는 점 등도 구체적인 계획 없이 서두른 근거라는 지적이 나온다.
여권 안팎에선 반대로 한동훈 장관의 최근 정치 행보가 시의적절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개인 한동훈’이 아닌 현재 여권 권력 무게추의 움직임으로 시선을 넓혔을 때 ‘예고편’으로서 확실한 도장을 찍었다는 것이다. 현재 국민의힘은 일종의 권력 과도기 상태다. 10월26일 혁신위원회가 구성된 직후 인요한 혁신위원장은 사실상 당의 중심이던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핵심 관계자)’을 비롯한 영남 중진들의 희생(험지 출마 또는 불출마)을 취임 일성으로 삼았다.
윤핵관 및 영남 중진 의원들의 ‘정리’ 방식에 뒷말이 끊이지 않았다. 소수의 윤핵관 의원들을 제외하면 인 위원장의 희생 주장 직전까지도 별도 언질이나 최소한의 사전 정지 작업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퇴로도, 생각할 시간도 없이 희생을 요구받게 된 일부 영남 중진 의원 주변에서는 이번 정리 과정을 두고 ‘사냥’ ‘공개 처형’과 같은 거친 표현도 나왔다. 윤핵관의 가장 상징적 인물인 장제원 의원을 비롯해 정치권에서 희생 대상으로 지목된 당사자들은 지역구에서의 세력 과시나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며 대치했다.
여권 내부에선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내세운 ‘희생’ 어젠다에는 ‘배후’가 있다고 해석한다. 이제 막 정치에 발을 들인 인 위원장 개인의 과감한 결정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혁신위원회 출범 계기는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의 수직적 관계 개선,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로 확인된 윤석열 정부에 대한 민심 회복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인 위원장의 타격 대상은 윤석열 대통령이 아닌 윤핵관과 영남 중진, 그리고 자신을 임명한 김기현 대표였다. 인요한 위원장의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도식 ‘개인 자격’ 참석과 ‘윤심’ 거론 등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한 듯한 행보들도 앞서의 지적에 힘을 싣는다.
집권 여당 내부가 술렁이는 과정에서 정치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 한동훈 장관, 그리고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다(〈시사IN〉 제843호 ‘구원투수 거론되는 그때 그 사람’ 기사 참조). 국민통합위원회는 지난 8월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실에서 국정기획수석실로 소속을 옮겼다. 국정기획수석실은 정부 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동안 국민통합위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이후부터는 공개 석상에서 더욱 위원회를 치켜세웠다. 10월17일 주요 부처 장관과 대통령실 수석, 국민통합위 및 국민의힘 지도부가 한데 모인 만찬에서 “우리나라 위원회 중 가장 열심히 일한 위원회”라고 언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김한길과 이철규의 인연
김한길 위원장과 가까운 인사들이 최근 장관 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12월 개각을 앞두고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차기 국가보훈부 장관으로, 유병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로 거론됐다. 유병준 교수는 국민통합위 경제계층분과, 김석호 교수는 사회문화분과 위원장이다. 이들은 8월 말 윤석열 대통령이 극찬하며 각 정부 부처와 당에 배포한 ‘국민통합위원회 1주년 보고서’의 저자들이다.
이철규 국민의힘 인재영입위원장과 김한길 위원장의 인연도 재조명된다. 경찰 출신인 이철규 위원장은 1998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 직후 인수위원회에 파견됐다. 김한길 위원장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이들은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철규 위원장은 김기현 지도부의 첫 사무총장이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가 곧바로 총선을 대비한 인재영입위원장으로 복귀했다. 윤핵관으로 분류된 이철규 위원장이 선거 참패 이후에도 중책을 맡으면서 ‘여당 실세’로 급부상했다.
대통령실과 여권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김한길 위원장과 자주 독대해 2~3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고, 정무적 판단과 인재 영입 등에 대한 조언을 참고한다는 말도 나온다. 이 때문에 김한길 위원장이 최근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에서 무게감 있는 역할을 맡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공천관리위원장 등 구체적인 자리도 언급된다.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비대위원장 등판설도 함께 거론되지만 무게는 김한길 위원장 쪽에 더 실려 있다. 정치 신인인 한동훈 장관이 총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당을 장악하기에는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는 만큼 김한길 위원장이 역할을 맡게 될 것이란 시나리오다. 간판은 한동훈 장관이 맡고, 김한길 위원장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를 받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정치권에선 그동안 김 위원장이 민주당 출신이라 보수 진영 내 비토 세력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는데, 최근엔 국민의힘 내 일부 초선과 중진, 개혁파 성향 의원들이 김 위원장과의 인연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보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임기가 정해져 있는 대통령의 시간은 계속해서 저물어갈 수밖에 없다. 이번 총선은 그 속도를 결정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 입장에선 정권 교체를 목적으로 힘을 합쳤던 윤핵관보다 더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 2기 여권 권력의 핵심은 윤핵관이 아닌 다른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