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방살이 탈출’ 뉴욕한국문화원의 개관전 맡은 在美 작가
세계 문화 중심 도시인 미국 뉴욕에서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해온 뉴욕한국문화원(문화원)이 내년 초 뉴욕 맨해튼 32번가 인근으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다. 1979년 12월 뉴욕총영사관이 있는 건물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한 문화원이 45년 만에 맨해튼 심장부에 새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 문화원은 개관전의 일환으로 재미(在美) 작가 존 배(86) 프랫 인스티튜트 명예교수의 개인전 ‘Eternal moment(영원한 순간)’를 준비했다.
11세에 미국으로 떠나 27세에 뉴욕 소재 사립 미술 전문대인 프랫 인스티튜트(프랫)의 최연소 조각과 학과장에 오른 그는 한국 문화의 불모지였던 미국에서 실력 하나로 인정받았다. 최근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만난 존 배 작가는 “예전에는 냄새난다고 집 밖에서 김치를 꺼내놓고 먹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현지에서 더 많이 찾는다. K푸드, K팝, K아트 등 K컬처가 세계인의 삶에 깊숙이 들어왔다” 며 한국 문화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1937년 10월 서울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배창근은 대한제국 의병단이었다. 남대문 시장 일대에서 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인 두 명을 죽인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고 한다. 아버지 배민수도 독립운동을 했다. 존 배 작가가 어렸을 때 일제 감시를 피해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를 갔다. 작가는 “내 작품의 원천은 일산에서 할머니와 아무것도 없던 들판에 누워 바라봤던 밤하늘”이라면서 “맑은 하늘에 별들이 움직였는데 별이 아니라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고 했다. 그가 사용하는 작품 소재는 철사다. 손가락 한두 마디 크기의 철사를 용접하면 부드러워지는데, 작은 철사를 이어나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완성한다.
어머니 최순옥은 당시 한국 정세에 불안을 느끼고 아버지를 설득해 배를 타고 1948년 12월 미군 철군 때 한국을 떠나 1949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듬해 작가의 부모님은 ‘한국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해야 한다’며 3남매를 지인이 살고 있는 웨스트버지니아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10대의 존 배는 매주 토요일 열리는 동네 무료 그림 수업에 참여했다.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이 개인전을 권해 15세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개인전은 나중에 그가 프랫 입학을 위해 제출한 포트폴리오로도 쓰였다고 한다. 제대로 예술을 배워본 적도 없던 그는 세계적 명성의 프랫에 4년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고, 2000년까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을 만들었다.
존 배 작가는 1960년대 들어 뉴욕에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서양화가 김환기, 피아니스트 백건우 등과 함께 작품 생활을 이어갔다. 외로운 타지 생활을 하던 한국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작가의 집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잠을 자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집에는 김환기가 “하나 골라 가져가라”며 준 작품이 벽에 걸려 있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작은 조각의 철사를 녹여 이를 붙여 나가는 방식이라 손끝 감각이 중요하다. 세월을 머금은 그의 손가락은 많이 굽어 있었다. 이번 문화원 개관전에서 그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최근까지 완성한 작품 12점, 드로잉 6점, 페인팅 1개 등을 전시할 예정이다. 미완성 작품들까지 20여 점을 선보일 계획이다.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느라 작가는 그의 집에 있는 작품 창고를 가고 또 갔다. 개관전에서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어떻게 느꼈으면 좋겠느냐고 묻자 예상 밖의 답이 돌아왔다. “사람은 각자 다른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작품을 봤을 때 다른 감정과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저는 어떤 관점을 그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운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는 것을 통해 작품에 새 숨결을 넣고 싶습니다.” 작고 강하면서도 스스로를 구부려 가며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는 철사와 작가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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