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이, 취임 날 정부부터 개혁… 18개 부처 9개로 줄여
‘아르헨티나의 트럼프’ 하비에르 밀레이(53) 대통령이 10일(현지 시각) 취임했다. 그는 이날 기존 18개 부처를 절반(9개)으로 줄였고, 대통령 비서실장에는 여동생을 전격 임명했다.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달러화 도입·중앙은행 폐쇄’ 공약은 당장 시행하지 않고 속도를 조절한 반면, 정부 재정 감축과 공공 부문 개혁 등은 예고대로 강력하게 진행하겠다고 했다.
밀레이는 이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방 의사당에서 전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에게 대통령직 인수를 뜻하는 어깨띠를 넘겨받고 취임 선서를 한 뒤, 연설 없이 퇴장했다. 1983년 민주화 이후 연방 의회에서 취임 선서 후 의원들 앞에서 연설하지 않은 대통령은 그가 처음이다. 이어 밀레이는 의회 앞 광장으로 걸어나와 준비된 연단에 올라 대중 연설을 시작했다. 밀레이는 “나라에 돈이 없다. 현재보다 더 나쁜 유산을 받아든 정부는 없다”며 국가 경제를 침몰 직전 ‘타이태닉’에 비유했다. 그는 “아르헨티나는 연간 1만500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겪을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도 했다. 올해 물가 상승률이 전년 대비 200%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 상황에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망국 수준으로 경제가 악화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전임 페로니즘(대중영합주의) 정부를 향해서는 “정치 계급”이라며 부패·무능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밀레이는 “나는 편안한 거짓말보다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걸 더 좋아한다. (개혁 정책들이) 임기 초기 경제활동, 고용, 빈곤층의 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도 “이것이 아르헨티나 재건을 시작할 마지막 지푸라기(기회)”라고 강조했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IMF(국제통화기금)에서 440억달러 구제 금융을 받았고, 내년 4월까지 채권국 등에 지불해야 할 금액만 100억달러가 넘는다. 인구 40%는 빈곤 상태이며 페소화 가치 폭락으로 달러화는 주로 암시장에서 거래된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정치 경력이 4년에 불과하고, 선거 유세에 전기톱을 들고 나와 “각종 보조금을 잘라버리겠다”는 밀레이를 국민이 뽑은 이유다.
이날 밀레이는 평소 ‘보스’라고 불러온 여동생 카리나 밀레이(51)를 비서실장에 전격 발탁했다. 이를 위해 친족을 대통령실과 부처 공직에 들일 수 없다는 규정을 수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AP는 ‘막후 실세’ 카리나를 비롯해 밀레이의 여자 친구이자 유명 코미디언인 파티마 플로레스(45), 부통령에 취임한 빅토리아 비야루엘(48) 등 여성 3인방이 밀레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 밀레이는 취임과 동시에 사회개발부, 노동사회보장부, 공공사업부, 환경부, 여성인권부 등 진보 정권의 ‘힘 있던’ 부처들을 줄줄이 폐쇄하고 기능을 대통령 비서관실로 옮기거나 다른 부처로 흡수시켰다. 대선 전 ‘극우’ 성향으로 분류됐던 그는 신임 장관들로 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정부(2015~2019년)에서 재임한 온건 성향 인사들을 대거 기용했다. 신임 경제부 장관에 내정된 루이스 카푸토 전 재무 장관은 밀레이의 공약인 ‘달러화 도입’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중앙은행 총재직에도 달러화로 전환을 주장한 인사 대신 과거 우파 정부의 산티아고 바우실리 전 재무 장관을 내정했다. 이에 따라 달러화 도입에 속도 조절을 한다는 전망이 나왔지만, 밀레이는 “(달러화 도입 철회는) 고려한 적 없다”고 했다. 외환 시장에서는 밀레이가 내년 초까지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의 격차를 좁히고, 중동 등지에서 차관을 통해 총 230억달러(약 30조원)를 확보하고 나서 내년 3월쯤 달러화 전환을 단행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됐다.
밀레이는 각종 보조금과 복지 예산 등을 감축해 연간 GDP(국내총생산)의 40%에 달하는 공공 지출을 GDP의 15%까지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당선 이후 언급했던 에너지 기업 YPF와 아르헨티나 항공 등 국영 공기업의 민영화도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밀레이는 “아르헨티나가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야당이 된 페로니즘 정치 세력과 노조 등의 반발도 예상된다. 이날 영국 일간 가디언은 “(밀레이 취임과 동시에) 첫 번째 반정부 시위가 이미 계획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응해 밀레이는 시위 강경 진압을 주장해온 우파 성향 파트리시아 불리치 전 치안 장관을 다시 치안 장관에 임명한 상태다. 전통 야권 출신인 불리치는 지난 10월 대선 본선에 출마해 3위를 했고, 지난달 19일 결선투표에서는 밀레이를 지지했다.
한편 이날 밀레이 취임식에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과 방기선 국무조정실장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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