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와 관계 설정 잘못, 에너지 종속” 정책 오판 반성하는 獨 정당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했다. 이를 반성하고 고치는 것이 우리의 ‘진보적 사명’이다.”
독일 집권 여당 독일사회민주당(SPD·사민당)이 10일(현지 시각) 폐막한 창당 160주년 기념 전당 대회에서 과거 사민당의 대(對)러시아 정책이 ‘명백한 잘못’이라고 했다. 사민당은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와 긴밀한 협력을 통한 ‘평화’를 추구해온 사민당의 친(親)러시아 정책이 독일의 러시아 에너지 종속을 초래했고, 유럽의 안보 위기를 초래했다”는 매서운 비판을 받아왔다. 1863년 창당한 사민당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자, 유럽을 대표하는 좌파 정당이다. 지난 2021년 총선에서 승리, 16년 만에 정권을 다시 잡았다.
독일 전국에서 모인 600여 명의 당원 대표들은 이날 ‘격변하는 세계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해답’이라는 결의문을 통해 “러시아와 경제 협력을 강화하면 러시아가 민주화할 것이라는 당의 가정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등) 주권 국가에 대한 정복과 억압을 통해 제국주의적 목표를 추진하는 한 러시아와 관계 정상화를 거부하겠다”고 못 박았다.
사민당은 결의문에서 “군대는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정책적 수단”이라며 “독일이 앞으로 세계 안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도 선언했다. 또 “유럽연합(EU)이 국방 정책과 무기 산업에서 비효율을 극복해야 한다”고도 했다. 독일의 재무장과 군비 확장을 통해 유럽 방위의 최전선에 나설 것임을 당의 강령으로 공식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은 과거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이 주도하는 집단 안보에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당 최고 지도부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잇따라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라스 클링바일 대표는 이날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푸틴과 먼저 더 거리를 두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롤프 뮈체니히 원내대표도 “우리는 푸틴의 제국주의적 생각을 완전히 과소평가했다”고 고백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앞으로 수년간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의 정책 실패로 초래된 결과(우크라이나 전쟁)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쟁쟁한 총리들을 배출했던 사민당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끈 우파 기독민주연합(CDU·기민당)의 16년 장기 집권 뒤 어렵사리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2021년 9월 총선에서 기민당을 누르고 원내 1당이 되고, 우파 자유민주당(자민당), 좌파 녹색당과 연립정부를 꾸렸다. 이들 당의 상징 색이 각각 빨강·노랑·녹색이어서 ‘신호등 연정’이라고 부른다. 함부르크 시장,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낸 올라프 숄츠가 슈뢰더 이후 16년 만에 사민당 총리로 취임했다.
사민당은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곧장 위기에 봉착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전면전 이후 ‘독일 책임론’이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 독일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 제재에 나서자 러시아는 “유럽에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겠다”며 위협했다. 러시아가 에너지 공급을 중단할 경우 엄청난 사회·경제적 혼란이 예상됐다. 2020년 말 기준 EU 회원국의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는 천연가스 38%, 원유 26%에 달했다.
유럽의 과도한 러시아 의존은 사민당 집권기였던 1970년대 당시 서독의 ‘동방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동독과 소련 등 공산 진영에 유화적으로 접근하는 동방 정책을 추진한 빌리 브란트 총리는 러시아 경제 협력 사업의 일환으로 시베리아 천연가스 개발에 나섰다. 서독이 기술과 자본을 제공하면, 러시아가 가스로 되갚는 방식이었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독일 사민당은 “중동보다 러시아가 훨씬 믿을 만하다”는 인식까지 갖게 됐다.
진보 성향 독일 주간 슈피겔은 “브란트부터 슈뢰더까지 이어지는 사민당 정권은 대러 경제 협력이 유럽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 유산은 메르켈 정권으로 교체된 뒤에도 이어졌다”며 “이로 인해 독일과 유럽이 ‘러시아산 에너지 종속’이란 푸틴의 덫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독일은 2000년대 초 슈뢰더 총리 시절 더 많은 러시아 가스를 수입하기 위해 러시아와 직접 연결하는 가스관을 건설하는 ‘노르트스트림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는 메르켈 시절 완성했다. 슈뢰더는 집권기 푸틴과의 개인적 친분을 앞세워 에너지와 경제 분야에서 러시아와 유대 관계를 급격히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권 교체 후 취임한 메르켈이 이런 대러 정책 기조를 바꾸려다 좌초할 정도로 양국 간 밀월의 틀은 강력했다. 그 결과 2021년 독일의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는 55%까지 치솟을 정도로 에너지 의존도가 커졌다.
당의 지난 정책이 독일 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사민당의 자성에 한몫했다.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로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전쟁 전의 최대 11배 수준으로 급등했다. 독일 전기 요금도 1년 새 85% 올랐다. 탈원전 정책 탓에 천연가스 발전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독일 기업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자동차와 기계 산업의 수익성이 급락했고, 독일 화학 산업은 생산 중단 사태까지 겪었다. 지난 8월 국제통화기금(IMF)은 독일의 올해 경제가 세계 주요 경제국 가운데 유일하게 역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독일의 지난 3분기(7~9월) 경제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 0.1%로 뒷걸음질쳤다. 한때 ‘유럽 경제의 성장 엔진’으로 불렸던 제조업 강국 독일은 이제 ‘유럽의 병자’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낮은 경제성장률에 허덕이던 20년 전 유행어 ‘독일병(病)’도 다시 소환됐다.
독일 에너지난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탈원전 기조에 사민당은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슈뢰더 총리 시절인 2002년 사민당은 ‘환경 보존이 경제적 이익에 우선한다’는 정강(政綱)의 녹색당과 연립 정권을 꾸리면서 “2020년까지 원전 가동을 모두 중단하겠다”는 탈원전법을 마련했다. 뒤이어 들어선 메르켈 총리 정부가 이를 보류하며 탈원전에 제동을 걸려했으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원전을 전면 폐쇄하고 신재생에너지의 비율을 높이는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돌아섰다. 사민당은 이 과정에서 탈원전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정권 내부에서도 탈원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정 파트너인 우파 자민당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탈탈원전’으로 입장을 바꿨다. 탈원전은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높이며 독일 경제에 독이 됐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원전 3기를 계속 가동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사민당은 다른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과 맺은 합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탈원전 기조를 고수했다. 결국 독일은 원전 첫 가동 62년 만인 올해 4월 16일 모든 원전의 가동을 중단하며 탈원전을 완성했다. 보수 성향 일간 디벨트는 “사민당은 이번 전당대회에서 친러 정책에 대한 반성을 한 것과 달리 탈원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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