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도 칼럼] 2023년 디딤돌 삼아 2024년 맞는 법
불평등 양극화 심화 맞서 분노하고, 희망 가지세요
‘어쩌다/막다른 골목에 들어왔다면/한숨 쉬지 말고/한숨 돌리고 가세요’.
지난달 29일 제23회 최계락문학상 시상식에서 들은 아동문학 부문 수상자 이서영 작가의 대표작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부분이다. 부산 사투리로 ‘산만디’인 동구 수정동 산복도로 골목길 모습을 정감있게 풀어낸 시다. 이맘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새해를 맞기에 안성맞춤인 경구(警句)라 여겨진다. 한숨 쉬는 것과 한숨 돌리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희망과 좌절, 실속과 맹탕 사이 어딘가가 우리 자리 아닌가.
따지고 보면 2023년 어느 하루라도 편한 날이 있었나 싶다. 윤석열 대통령은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대한민국 미래와 미래세대 운명이 달린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을 더 미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그 개혁은 언제 가능하냐고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만큼 지지부진하다. 그날 새벽 북한은 동해상으로 단거리탄도미사일(SRBM)을 발사하며 강경 기조를 예고했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이 미사일 발사로 시작된 남북 대치 국면은 지난달 21일 밤 북한의 정찰위성 기습 발사와 우리 군의 정찰위성 발사로 날이 섰다. 그 사이 남북의 9·19 군사합의가 휴지조각이 됐다.
이처럼 올해 맞닥뜨린 막다른 골목은 유독 아퀴를 짓지 못하고 해를 넘기는 사례가 많다.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 대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 등 지정학적 갈등, 챗GPT가 불러온 인공지능(AI)과 인간의 대결이 그렇다.
‘상저하고’라던 경제지표를 돌이켜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상반기에 비록 바닥을 기더라도 하반기엔 우상향으로 바뀌리란 전망은 희망고문에 그쳤다. 올 경제성장률이 1.4%도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3년 만에 코로나19사태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났으나 서민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전세사기 피해자는 사회 초년생인 젊은층에 집중됐고, 집중호우로 목숨과 재산을 잃은 우리 이웃이 부지기수이며, 학부모 민원에 시달리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등 교사는 신출내기였다. 젊은이의 목숨과 바꾼 전세사기 피해자와 교권 보호 대책이 겨우 국회 입법으로 명문화됐으나 이마저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년에도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는 세계 구도와 지정학적 갈등이 더해진 무역 및 에너지 위기 속에 우리 안보와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고 서민에게 더 큰 충격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것이다. 불평등과 양극화가 우리 곁에 똬리를 틀고 있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에서 그 단면이 확연하다. 인구 감소가 흑사병보다 더한 국가 소멸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에도 서울과 수도권 집중은 더 심화한다. 서울을 더 키우자는 ‘메가 서울’을 여당이 선거용 공약으로 제기한 판이다. 지난해 무산된 부산울산경남특별연합(메가시티) 책임 공방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방시대를 주창하는 윤석열 정부에서 나오는 앞뒤 안 맞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지만 그 과실이 어디로 쏠렸는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부산은 더하다. 부산이 서울과 상응하는 거점으로 자리잡고,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대한민국의 플랫폼으로 거듭나고자 매달렸던 2030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는 참패로 끝났다. 4차 산업혁명과 기후위기가 초래한 세계적 대변환 흐름 속에서 디지털 전환과 에너지 전환의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이게 2023년 부산이고, 대한민국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니라 실패를 분석하고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 한다.
어김없이 해가 지고 새날이 온다. 한숨조차 쉬기 힘든 막다른 골목이지만 한숨 돌리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 올해 수능 필적 확인 문구로 쓰인 양광모 시인 시구처럼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는 법이다.
새해엔 정치의 회복을 기대한다. 1월 대만부터 11월 미국까지 세계 40개국 32억 명이 선거를 치른다. 그 중 대한민국 22대 국회의원 선거는 4월 10일이다. 선거는 유권자가 직접 권리를 행사하는 기회다. 선거제 협상과 새해 예산안 처리, 그리고 거대 양당의 혁신과 신당 출현 가능성을 유심히 살펴보며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불평등과 양극화에 분노하면서 이를 누리는 기득권 카르텔을 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하겠다.
영화 ‘서울의봄’이 인기다. 44년 전 오늘 일어난 12·12사태가 배경이다. 영화를 보면서 분노가 치밀었다는 사람이 많다. 그날의 9시간을 분초로 나눠 들여다보니 분노의 대상이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분노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더 구체적인 분노 좌표와 희망 목표가 필요하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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