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09] 빵을 먹는 파란 머리 유령
묘하게 귀여워서 웃음이 나는 그림이다. 동그란 파란 머리 유령이 눈을 감고 얼굴만큼 큰 빵을 음미하며 가느다란 다리로 사부작사부작 걷는다. 빵 덩어리를 손에 들고 있는지, 아니면 입안 한가득 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신 입을 오물대는 건 알겠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낭떠러지인데 눈을 감고 걸으니 알 리가 없다. 심지어 오른쪽 구석에는 시커먼 망토를 입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버티고 서 있다. 그런데도 음산하거나 불길해 보이지는 않는다. 노란 손톱 달이 넷이나 떠 있는 하늘 아래 초록 들판이 펼쳐진 세상에서는 발을 헛디뎌도 두둥실 떠오를 것 같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미술가 메레트 오펜하임(Meret Oppenheim·1913~1985)의 작품은 대체로 이렇게 기묘한 존재가 천진하고 유머러스하게 등장한다.
오펜하임은 베를린에서 의사인 유태인 부친 아래 태어났지만 출생 직후인 1914년 1차 대전이 터지자 가족이 스위스 바젤로 피란해 거기서 자랐다. 1932년 파리에 잠시 머물면서 다양한 작가들과 어울리며 자유분방한 예술 세계에 눈을 떴지만 2차 대전이 일어나 바젤로 돌아가야 했다. 이 작품은 1936년 바젤에서 처음 연 개인전에서 함께 파시즘 반대 운동을 하던 동료에게 팔았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충만했던 오펜하임의 개인전은 대성공이었지만, 이 전시를 끝으로 그녀는 오랫동안 창작을 접고 생업에 종사해야 했다. 나치를 피해 도피한 스위스에서 부친의 의사 경력은 크게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원소장자의 집을 떠나지 않았던 이 작품이 올해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어디엔가 그녀의 유령이 있다면 기분 좋게 둥실 떠올랐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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