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목 칼럼] 키신저 외교철학이 남긴 것

세계 최고의 외교철학자가 영원히 잠들었다. 정확히 100년의 세월을 살고. 키신저(H. Kissinger) 전 미 국무장관은 어린 나이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후 나치의 국제정치 같은 것이 되풀이되는 걸 막기위한 외교기반을 세상에 선사했다. 레알폴리트크라는 철저한 현실주의 외교철학이 미국 외교노선으로 자리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노선으로 소련과의 데탕트가 조성됐고, 중국의 대외개방이 가속화됐다. 파리평화협정 체제로 베트남전이 종식되고, 수많은 키신저 셔틀외교는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 외교는 지리적 조건과 정치와의 관계 속에서 현실노선을 일관되게 걸을 때 진정한 성과를 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미-중 패권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지금, 세계가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기초해야 하는 노선이 아닐 수 없다.
작년 말 UN 안보리에서 키신저가 자문한 내용 중 우리가 귀담아 들을 내용이 많다. 그는 북한 문제는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고 있는데도 강대국들의 대(對)북한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기에 심각하다고 보았다. UN 사무총장 등이 나서서 일정한 사실조사 활동을 통한 중재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동 문제는 일시적 해법보다 심리적 측면이 핵심인 바, 아랍 시민들의 의식을 개선시켜 나가는 길이 궁극적 해법임을 설명하기도 했다.
지난 한국 정부는 대외정책 자체를 철저하게 국내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접근했다. '당당하고 자주적인 외교'라는 구호 하에 북한 퍼주기, 일본 때리기, 외교 적폐 청산 등의 이념적 결과물만 쏟아낸 것을 외교적 성과로 믿는 국민들이 아직도 많다.
이런 이념외교 탈피를 내세운 현 정부 외교가 또다른 반대이념의 길로 가고 있는데도 많은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반도체 선도국인 우리는 아직도 반도체 다자협력체제 하나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전략물자 수출 통제에 관한 바세나르 체제나 다자 미사일 통제 체제의 오랜 성공 사례를 지켜보면서도 말이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키신저가 던지는 첫 번째 물음은 "도대체 왜 외교가 실패했을까"였을 것이다.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과 중국발 요소수 대란처럼 즉시 대응해야 하는 문제들이 터지면 터질수록, 먼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가 아니다. 불확실성 시대에는 무너지는 둑을 가래로 막느라 들이는 노력보다 둑이 무너지고 있는 원인에 대한 분석과 처방이 더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키신저의 현실적 '예방 외교'의 지혜를 곱씹어야 한다.
그의 외교는 강대국들간의 거래와 세력균형 게임 하에서 약소국의 운명이 결정되고 마는 부작용도 낳았다. 강대국 외교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일 수 있고, 어찌보면 마키아벨리즘의 극치일 수 있다. 이런 노선은 메이저 플레이어 간 거래와 철저한 현실적 계산이 지배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노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게 그저 한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고 세계질서의 파국을 막고 안정적으로 질서를 운영해 나가기 위한 진정성 있는 소신에 기초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의 하바드대 학부 졸업논문이 그런 진정성을 이미 증명해주고 있다. 400쪽이 넘는 논문에서 끊임없이 그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인간의 자유(freedom)라는 이상과 필요(necessity)라는 현실간의 조화와 충돌의 관계다. 그의 외교적 해법이 자유를 긍극적 목적으로 한 필요적 타협이기에 그의 선택이 좀더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일까? 그의 필요적인 그레이트게임 덕택에 제3차 세계대전이 최소한 100년 동안 방지될 수 있는 자유가 올 수 있었다.
그의 학부 논문에 등장하는 3명의 역사학자가 말해주듯이, 그의 타협적 선택은 최소한 토인비(A. Toynbee)에겐 칭찬받을 일이었고 슈펭글러(O. Spengler)에겐 용서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칸트(I. Kant)에 의한 준엄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2023넌 11월 29일 생의 눈을 감은 100세의 거장이 떠올린 마지막 인간은 몇달 전 만났던 시진핑 주석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칸트를 만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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