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이주노동자들의 ‘존재선언’
“사장님, 당신은 내 굶주림과 결핍을 해결해주셨어요/ 당신에게 감사드려요/ 이제는 나를 죽게 해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알았어/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 그 일들을 모두 끝내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 죽으렴!”(<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에 수록된 러메스 사연의 시 ‘고용’)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의 이 시구절은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2003년 겨울 이 땅에 유난히 ‘외국인 전태일’이 많았다. ‘노예노동’ 산업연수생 제도에서 ‘농노노동’ 고용허가제로의 전환을 앞두고 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단속을 피하기 위해 도주하다 숨지고 자살하기도 했다. 참다못한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 선언을 했다. 2003년 11월15일부터 380일 동안 명동성당 들머리는 그렇게 해방구가 됐다.
노동운동사의 한 획을 장식한 이 투쟁이 20주년을 맞아 서울 마포 강북노동자복지관에서 ‘존재선언’이란 전시회로 기억되고 있다. 그 자리를 지켰던 이주노동자들 다수는 본국으로, 제3국으로 갔지만 그들의 외침은 그대로 남았다. 17일까지 열리는 전시회에는 그들의 농성이 “노동 비자, 당장 줘라” “불법 불법, 하지 마라 하지 마라” 구호와 당시 수기·그림·사진 등 아카이빙 자료들로 생생하게 구현됐다. 투쟁의 성과는 2015년 대법원에서 인정받은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다. 하지만 지금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그때보다 낫지 않다. 이주노동자들이 요구해온 ‘사업장 이동의 자유’는 여전히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정부가 추진하는 최저임금 미만 가사노동자 도입은 20년 전 폐지된 산업연수생 제도로의 퇴행이다.
당시 농성을 주도한 서머르 타파(네팔 체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나 스스로 노동자라는 걸 인정하고 노동자로서 한국 법에 따라 권리·책임을 잘 알게 되면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문제를 해결하며 당당하게 살 수 있다. 그러면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엑스포 유치를 위해 한국이 사우디아라비아보다 이주노동자 인권 보장이 더 잘돼 있다는 점을 네팔 표 공략 포인트로 삼았다는 정부와 재계는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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