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사라진 ‘대입 4개 경로 다양화’…뭔가 수상했다


2003년 6월16일(월) 오후 4시 교육혁신위원장 후보인 전성은 거창고 교장이 청와대에 나타났다. 젊을 때 거창고 교사를 했던 정찬용 인사보좌관, 조재희 비서관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면담했다. 입시제도, 지방대 육성, 서울대 폐교론, 교육 ‘성골’ 등이 화제에 올랐는데 노 대통령이 내게 “정책실장은 경북고, 서울대 나왔으니 성골이네요”라고 농담을 했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 서열 타파, 대학평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7월31일(목) 2시 반, 교육혁신위원 위촉장 수여 및 첫 회의가 열렸다(세종실). 노 대통령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1998년 교육위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이야기, 윤덕홍 교육부 장관이 대구 출신 비주류라 고생했던 이야기, 국민이 신뢰하고 안도할 수 있는 위원회가 되어달라는 부탁 등 40분이나 발언하다 전성은 위원장의 제지를 받았다. 신윤표 한남대 총장은 박정희 새마을운동을 찬양하는 등 시대착오적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전 위원장의 제지도 무시하고 발언을 이어가다가 대통령이 제지하자 비로소 중단했다.
고병헌 교수(성공회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평생학습을 강조한다며 광명시 평생학습원을 운영한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하위 30%에도 혜택이 닿게 하려면 교육, 문화, 복지가 같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회수 교수(전남대 교육학과)가 인상적인 말을 했다. “대학 입학할 때는 90여개 학과가 있는데 졸업할 때는 국어, 영어, 상식 3개밖에 없다. 공무원 및 기업체 인력선발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대학교육의 내용도 달라질 것이다.” 이재강 공군기술고(현 공군항공과학고) 교장(공군 대령)은 “학생 비중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실업계가 진학 준비에 집중해 파행적으로 운영한다. 대기업은 이들 채용을 기피하는데 문을 열어야 한다. 산학연 협력을 통해 직업교육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김민남 선임위원(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은 “교육에 경쟁이 필요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격화되어 있다. 고통을 경감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노 대통령이 긴 마무리 발언을 했다. “입시제도를 국·영·수 만으로 뽑는 건 좋지 않다. 대학서열화는 문제다. 대학교육은 왜 개방 안 되나. 경쟁원리를 도입하면 교수 모욕인가?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평가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정보화 시대는 1등이 독식하는 시대다. 한국아이비엠(IBM) 직원 3천명 중 핵심 인력은 15명이라고 하더라. 천재를 인정해야 하고 하향평준화는 곤란하다. 영재교육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주택 등 다른 불평등은 참을 수 있으나 교육 불평등은 못 참는다.”
교육혁신위로 자리를 옮겨 현판식 및 첫 회의를 가졌다. 중장기 전략수립에 집중하고, 인재 양성에서 소외되는 사람 없이 함께 가며, 4개 분과로 나누고 각각 상근간사를 두기로 합의했다. 학교교육(김민남), 고등교육(김회수), 직업교육(이재강), 교육분권·자치(간사 미정). 교육혁신위는 앞서 두달 동안 대구, 진주, 거창, 광주, 서울에서 회의를 거듭해왔다. 보통 서너시간, 어떨 때는 1박2일 회의를 했다고 하니 열성이 대단하다. 새 위원회는 근본적 개혁을 해내겠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12월1일(월) 3시 교육혁신 방안에 대한 대통령 보고가 있었다(집현실). 전성은 위원장 사회로 윤덕홍 장관과 이종재 교육개발원장, 교육부 간부 3인, 청와대 참모들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김민남 선임위원이 종래 한줄 경쟁에서 여러줄 경쟁으로 가기 위해 4개 경로별 입시로 가고, 학교교육을 관리통제에서 지원행정으로 바꾸는 내용을 보고했다. 윤덕홍 장관은 “전체 방향은 옳고 좋은 비전을 제시했다. 아직 추상적인데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다만 공동학위는 평준화인데 경쟁력이 있을까 의문”이라고 대체로 긍정적으로 논평했다. 권오규 정책수석이 세계화 시대에 지방화로 가는 것은 방향이 틀렸다고 비판했고, 이종재 원장과 교육부 간부들이 동조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지방화 방향은 맞다고 정리하고, 다만 지방 명문고 부활, 파벌 형성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내가 나서서 4개 경로별 입시를 적극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특히 내신 중심으로 뽑으면 지방을 살리고 학생들의 고통을 줄일 거라고 했다. 이종재 원장과 정기언 교육부 차관보는 대학서열을 타파하면 하향평준화된다며 반대했다.
조금 뒤 관저에서 노 대통령, 김병준 정부혁신위원장과 셋이서 저녁식사를 했다. 노 대통령이 “내가 아까 너무 심하게 교육혁신위를 비판했나요?”라고 묻기에 “아닙니다. 대통령이 교육혁신위 안을 상당 부분 수용했기 때문에 결과가 괜찮다고, 회의 직후 제가 교육혁신위에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내신 중심으로 가면 대통령이 걱정하는 명문고 부활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노 대통령이 내신 중심은 찬성한다면서도 현재 내신은 문제가 있어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수’를 남발하는 문제는 시정해야 한다”고 동의하면서 내신이 수능보다 대학 학업성취도와 더 높은 상관관계가 있고 명분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교육혁신위 1차 데뷔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몇달 준비 끝에 꽤 개혁적 방안을 내놓았고, 대통령의 반응도 좋았다. 그러나 교육혁신은 쉽지 않았다. 그 뒤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12월9일(화) 9:30 교육혁신 토론회가 열렸다(교육부). 김영식 교육부 실장의 보고에 이어 토론이 있었다. 전풍자 위원은 경쟁을 강조하면서 대학서열 타파를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공격했다. 심지어 기부금 입학에 찬성할 정도로 시장만능주의에 기울어 있었다. 홍훈(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가 반박하면서 대학서열 타파 없이 다른 방안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공교육 내실화, 사교육비 인하와 대학서열 타파를 병행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신일 교수(서울대 교육학과)는 정규 대학 중심에서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시도하듯 대학 외 고등교육기관의 학력인증제도로 가야 하고, 현재의 대학 중심 선발을 고교 졸업자격고사로 바꾸어 고등학교를 대학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회수 교수는 고교 학력고사 도입은 중학교 과외를 불러와 위험하다며 반대했다. 그는 현재의 내신+수능에 반대하며 ‘내신 또는 수능’이 돼야 한다고 정곡을 찌르는 주장을 했다.
12월11일(목) 5~7시 사교육비 대책 토론이 속개됐다. 김영식, 김민남, 김회수, 김성진, 박백범, 신봉호, 홍영만이 참석해 대입제도를 토론했다. 2008년 대입부터 혁신위가 주장하는 경로별 입시 방안을 도입키로 합의했다. 4경로(내신 50%, 수능 20~30%, 직업학교 10%, 사회통합 10%)로 학생을 선발하는 획기적 개혁안에 합의해 모두 만족했다. 이것은 대한민국 교육의 틀을 뿌리째 바꿀 근본적 개혁안이었다.
12월12일(금) 9시 사교육비 경감대책 회의(집현실). 윤덕홍 장관 사회로 김영식 실장이 보고하는데, 어! 전날 합의한 4경로 입시제도가 빠져 있었다. 전성은 위원장도 다른 얘기만 했다. 노 대통령은 방과 후 일류 강사를 학교에 초빙해 하는 과외와 사이버교육에 관심을 보이며 적극 지지했다. 방과 후 과외는 시골이 불리하다는 주장(박봉흠 장관과 이재강 교육혁신위원)이 일리 있었지만 대통령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원래는 나흘 뒤(16일) 최종보고 예정이었으나 계획을 바꾸어 그날 대학입시제도 토론을 한차례 더 하기로 했다. 그때 경로별 입시를 내걸 기회는 살아있긴 했으나, 교육부가 어제 합의해 놓고도 오늘 빼버린 것이 매우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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