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끝에서 시작을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온 즈음, 대한민국 최북단 강원도 고성으로 의미 있는 여행을 떠났다
(시사저널=글 김현정·사진 신규철)
채광이 환한 로비를 지나 전시장에 들어서자 어둠이 밀어닥쳤다. 적응하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서서 눈을 감았다 떴다. 전쟁이란 이런 것일 터다. 짙은 암흑. 해가 뜨든 지든 앞이 보이지 않는 듯한 두려움. 벽에 걸린 한국전쟁 당시 사진을 보면서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다 시선이 우연히 천장에 닿은 순간 숨이 콱 막혔다. 천장 한쪽에 뚫린 구멍에서 군인 세 명이 총을 들고 관람자를 겨냥하고 있다. 모형이라도 가슴이 선뜩하다. 70여 년 전 그날엔 일상의 공간에서, 피란 간 지역에서 실제 일어났을 일이다. 강원도 고성 DMZ박물관은 내가 밟고 선 이 땅이 어떤 곳인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기원을 알려 주는 곳이자 한국 최북단의 박물관이다. 한 해의 끄트머리, 민간인에게 허락된 북쪽 땅 끝으로 떠났다.
가장 아름다운 건 바다와 산, 그리고 평화
DMZ박물관은 민간인 통제선 안에 있다.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각각 2킬로미터를 비무장지대 곧 DMZ로 정하고, DMZ가 끝나는 남방한계선에서 약 5~20킬로미터 거리에 민간인 통제선을 설정했다. '통제'라는 단어가 붙은 만큼 입출국할 때처럼 출입 신고를 거쳐야 들어간다. 생소한 이 과정부터가 평범하지 않은 여행의 시작을 알린다.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민통선을 지나 불과 10여 분 만에 DMZ박물관에 도착했다. 로비엔 북한 이탈 주민이 타고 내려온 배가 눈길을 끈다. 고기 잡는 데 썼을 법한 5.7미터 길이 통통배에 인생을 걸었을 막막함이 눈물겹다. 전시는 네 개 주제로 구성했는데, 제1전시실은 DMZ의 '축복받지 못한 탄생'을 다룬다. 사진, 참전 군인의 물품 등 다양한 자료는 물론 DMZ를 낳은 정전 협상 과정을 자세히 보여 준다. 우리는 1953년 7월 27일이 휴전일이고 DMZ가 설정되었다는 결과만 기억하지, 1951년 7월 10일 첫 회담이 열리고 2년 동안 얼마나 지난한 논의가 필요했는지는 잘 모른다. 누렇게 바랜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록의 엄청난 두께에서, 회담 모형에서 긴박함이 읽힌다.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했다는 정전협정문 서언처럼 한국군․유엔군만 77만 명 넘는 전사자․부상자․실종자를 낳은 전쟁, 남북한 민간인을 합해 450만여 명 인명 피해를 기록한 끔찍한 전쟁이 그날 그쳤다.
총탄 구멍이 난 철모, 녹슨 탄환, 임춘수 소령의 수첩과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전시물이 전쟁을 전한다. 슬픔이 가슴을 스친다. 어느 관람자에게는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슬픔이겠으나,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찌르는 아픔임을 생각한다. 품에 가족사진을 안은 채 전사하셨다는 소령님께, 그분을 비롯한 모든 피해자께 눈을 감고 명복을 빌었다.
남북 대치 역사를 정리한 제2전시실은 초반에 사진 자료가 흑백에서 1980년대 말 컬러로 바뀐다. 이만큼 시대가 변하고도 대립은 해소하지 못했다. 지뢰 매설 모형을 놓은 곳에 서자 갑자기 폭발음이 들려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뢰 종류가 360여 종, 남한 내 지뢰 피해자가 무려 1만 명. 전쟁과 지뢰는 실제 생명을 꺼트린다. 삶의 치열함을 전쟁이라고, 일상 속 숨은 위험 요소를 지뢰라고 빗대어 말하지 않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분단과 대립의 비극이 가져온 의외의 결과가 DMZ의 자연 생태 환경이다. 사람이 갈 수 없는 땅에서 생명이 피어났고, 더 이상 싸우지 말아야 할 명확한 이유가 되었다. 제3전시실에서 이를 확인하고, 남북 철도 연결 사업 같은 협력의 역사도 반추한다. 전시장 마지막에는 관람자가 쓴 소원지를 주렁주렁 매단 소원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개인의 욕심을 내려놓고 평화와 생명이라는 소원을 앞에 두게 된다. 아니, 욕심을 실현하려면 평화가 무엇보다 우선 조건이다. 전쟁은 개인의 꿈도, 생명도 파괴하므로.
박물관 건물 밖도 거대한 전시장이다. 남방한계선 폐철조망과 철주를 소재로 평화의 아이콘을 만든 빅터 조 작가의 '피스!' 등 예술 작품을 설치했고, 그 옆 초소는 강릉 사천해변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벽의 '초병 일반 수칙'도 그대로라 긴장감을 더한다. 고성 삼포해변에서 사용하다 여기로 가져왔다는 철조망을 따라 걷다가 언덕 위, 대북 선전 방송 장비가 눈에 띄었다. 2004년 6월 심리전을 중단하자는 논의 끝에 철거해 지금은 '유물'이 되었다. 조용한 방송 장비는 역설적으로 평화를 말하는 것 같다. 박물관 옆 바다가 시리게 아름답다.
내친김에 이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북을 향해 조금 더 달려 고성통일전망타워에 간다. 1980년대에 지은 2층짜리 옛 전망대는 2018년 12월 문을 연 34미터 높이 새로운 전망타워에 역할을 내주고 은퇴했다. 과연 전망대라는 이름값을 해 웅장한 전망이 감탄사를 내뱉게 한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작품을 비롯한 수많은 그림이나 사진으로 익숙한 금강산이 저편에 고개를 내밀고, 푸른 동해가 눈을 꽉 붙들어 맨다. 도로는 해안선과 나란히 이어지건만 가로등은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거기가 바로 남과 북의 경계다. 금강산만큼 빼어나다는 해금강, 부처바위․사공바위․복선암…. 빤히 보이는데 절대 다가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남과 북의 바다는 경계가 없었다. 색도 똑같이 푸르고, 똑같이 맑았으며, 정말 똑같이 아름다웠다.
끝의 땅, 시작을 꿈꾸는 땅
전망타워에서 나와 앞마당을 거닐었다. 351고지 전적비, 한국 공군의 옛 주력 전투기, 통일 염원을 담은 해수관음상과 십자가 예수상을 차례로 만났다. 태양은 땅과 바다에 고루 빛을 보내고, 파도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북한 사람도 동의할 것이다. 남과 북은 DMZ의 모든 동식물, 미생물, 흙 한 줌까지 함께 사랑하고 보살필 책임자다. 이 산과 바다, 강과 들판, 역사 유적을 가진 DMZ를 대립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 했다. 2023년이 끝을 향해 가는 지금, 끝의 땅에서 시작을 꿈꾼다. 의미 있는 마무리, 새로운 내일을 향한 걸음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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