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납치된 ‘한 조선 도공의 신화’…진실은 본관도 족보도 잘 모른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자기 장인들은 역경을 딛고 현지 백자 생산을 이끌어낸 근세기 한·일 문화교류 공로자들로 평가된다. 한일수교 50주년을 앞두고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1598년 전라도 남원에서 규슈로 끌려갔다는 설이 전해지는 도공 심당길 15대손으로, 규슈 남단 가고시마에서 특산 도자기 ‘사쓰마야키’ 생산가마를 운영하며 가업을 잇고있는 장인 심수관(64·본명 오사코 가즈데루)씨의 행보가 주목된다. 그는 2019년 주가고시마한국명예총영사로 임명됐고 명예남원시민 인증도 받는등 문화외교의 가교를 자임하며 활동중이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대해 학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심수관 가문을 비롯한 납치 도공과 후손들의 역사적 뿌리, 활동 내력, 작품의 의미 등과 관련해 객관적 사실들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있을뿐 아니라 상당수 내용들이 과장되거나 가공됐다는 의문까지 제기되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도자사학계의 권위자인 방병선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팀과 지난 7~8월 일본 규슈 일대의 조선 도공 관련 유적과 유물들을 답사했다. 이를 토대로 납치 도공 신화에 대한 논란과 진실을 다룬 칼럼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심수관 선생 선조들은 조선에서 옹기를 만들던 장인이었을까요? 백자를 만들었던 장인이었을까요?”
“일본에 온 저의 선조 1대 장인(심당길)은 도자기 굽던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자기나 옹기 어느 쪽도 안 만들었던 것 같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 나왔다. 지난 7월29일 일본 규슈 가고시마현 미야마시에 있는 도예가 심수관씨의 가마 작업장 회의실에서 열린 심씨와의 대담 자리는 방병선 교수 답사팀원들에게 당혹스러운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면 심씨의 선조 심당길은 도공으로 끌려온 게 아니라는 말인가? 심씨는 말을 이었다.
“옹기나 도자기를 만든 사람은 성도 없는 천민이었죠. 선조 심당길은 성과 이름이 있었고 찬이라는 어릴 적 이름도 있었다고 해요. 400년 전 조선에서는 성을 갖는 사람이 일부였을 텐데요. 당시 가고시마를 지배하던 시마즈 가문의 군이 부산에서 잡아서 데려온 포로들을 긴카이, 즉 김해(金海)라고 불렀어요. 사람 이름 대신 부산 인근 김해 지명으로 불렀는데 나중에 그게 그들 성이 됐어요. 우리 선조는 초대 도공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난 생각해요. 야키모노(도자기)는 여기 와서 하게 된 것 같아요. 도공이 어떻게 어렸을 때 이름을 갖고 있겠어요.”
그의 발언은 일본 내 조선 납치 도공의 본적과 현지 도착 경위, 작업 활동 성격에 대해 양국의 학계와 언론계에서 좀 더 면밀하고 심층적인 사실 찾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방병선 교수는 “수년 전만 해도 심씨는 자신의 선조들 뿌리와 족보 등에 대해 물으면 모르니 한국에서 알아봐달라는 대답을 꺼내곤 했다. 그의 발언이 달라졌다”고 했다.
15대 후손 심수관씨는 현재 일본에서 독특한 뚫음무늬인 투각 기법과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정교한 인물과 동물 등의 조형물 도자상으로 건재를 과시하며 가고시마를 대표하는 도자기 업체를 운영 중이다. 지난 7월 대담자리에서 선조인 조선 도공의 혼을 이어받아 생명이 약동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국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지난해와 올해 본관이라고 밝힌 경북 청송과 선조 심당길이 피납됐다는 전북 남원, 조상묘가 있다는 경기 김포 등지를 방문해 기념관 건립 등의 선양 사업을 논의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그를 초청해 한일수교50주년 특별전 추진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 2일엔 국악인들이 가고시마현 공연장에서 심씨를 초청한 가운데 심수관 찬가를 열창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최근 그의 행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조상의 뿌리를 찾았다고 알려진 대목이다.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장에 초대받아 갔다가 청송 심씨 종친들을 만나 김포에 선조 심당길의 부친 심우인과 조부 심수의 묘소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해 7월 예복을 차려입고 무덤 앞에 가서 제사를 지내며 후손임을 고한 것이다.
피납도공의 후예임을 역설해온 심씨가 가문의 본관이 청송이라고 밝힌 것과 선조들이 남원 등 조선에서 활동한 행적에 대해 언급해온 내용들은 가문의 구전과 도공 심당길이 납치된 조선의 본래 거처를 남원으로 지칭한 유명작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랴’ 외에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임진왜란 당시 가고시마의 지배세력인 시마즈번의 군사들이 전라도 순천과 남원 등지로 출병해 80여명의 도공들을 연행했다는 기록이 있어 심당길이 끌려간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본관이 청송이고, 남원에서 선조들이 활동했으며, 김포에 조상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선시대나 일본 에도시대의 객관적인 세부 기록과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적인 사례가 족보 문제다. 청송 심씨 문중은 수년 간격으로 족보를 재간행하고 있는데, 2000년에 펴낸 ‘경진보’ 족보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심당길이 2017년 나온 족보인 ‘정유보’에 의금부도사 등을 지낸 심우인(1549~1611)의 아들 찬의 초창기 이름으로 돌연 등장한다. 정유보에서는 심찬의 초기 자(이름)가 당길이라면서, 일본으로 피랍된 정황을 세세히 기술했다. 무관인 건신도위에 재직할 당시 왜란이 일어나 일본에 납치됐고 가고시마에 정착해 사스마야키를 창설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더해 15대손 심수관까지 이어지는 심당길 후손들의 명단과 주요 활동이력까지 모두 족보의 계보에 편입시켰다. 앞서 지난 2013년 15대손 심씨가 집필한 ‘심수관가 역대 수장고’ 설명서를 보면 원조인 1대 심당길이 청송 심가 12대손 심찬으로 왜군의 2차 출병(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싸우다 끌려갔고, 포로가 된 것을 수치로 여겨 평생 아명인 당길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고 기술해놓았다. ‘정유보’는 사실상 이 내용을 토대로 족보 내용을 대대적으로 고친 것에 가깝다. 심씨가 지난 7월 방 교수팀과 한 대담을 통해 자신의 가문이 원래 도공 집안이 아니라고 말한 데는 그의 집필본 내용에 따라 6년 전 바뀐 청송 심씨의 족보가 근거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대담 당시 선조 심당길이 청송 심씨 무반 가문의 일원으로 남원에서 어떻게 활동했고 일본에 어떻게 왔는지에 대한 명확한 사료상의 근거는 대지 않은 채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한국에서는 400여년 전 일을 일주일 전처럼 이야기하더군요. 어떤 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의문은 깊어진다. 무관은 조선 지배층 관료다. 전란 뒤 조선정부가 일본에 요구한 납치자 송환 일순위 대상자였다. 심당길이 무관이었다면, 당시 조선 조정에서 임명한 교지 등의 기록이 존재해야한다. 당연히 일본쪽의 송환 기록에도 나와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방 교수는 “전투중 포로가 된 양반계급의 무관이 일본에 끌려가서 신분이 미천한 도공으로 바로 전업한 뒤 새로 기술을 익혀 원료를 찾아내고 고난도 백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일본 어느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며 “어떤 역사적 물증도 보이지 않는데 심수관 가문 1~15대 손들을 청송 심씨 족보에 전격 편입시킨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본관이라는 경북 청송군 부동면 심수관 도예전시관 앞에 붙은 설명판에는 심당길이 남원에서 무관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고 기술해놓고 다음 구절에서는 왜군이 퇴각할 때 납치된 조선 도공 80여명중 한명이었다는 모순된 내용이 나와있기도 하다.
심당길 후예들은 17세기 이래 일본에 와서 척박한 환경을 견디며 규슈 남부에서 백자토를 찾아낸 뒤 창의적인 도자 작품들을 만들어 일본 근세 도자사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들에게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은 17~18세기의 옹기나 흑유도기, 백자잔 같은 조선풍 소품이 아니라 19세기 말 화려한 채색과 금박으로 일본의 풍속과 풍경을 담아 장식한 거대한 화병과 정교한 인물, 동물 등의 입체 조형물들이었다. 현재 15대 심씨의 증조부인 12대 심수관은 근대 공장제 생산방식을 일본 채색자기 스타일에 결합시키면서 1870년대 이후 서구 박람회에서 큰 상을 받고 천황가의 관심 속에 황족과 귀족층에도 납품 하는 등 당대 일본 도자의 대표 브랜드로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이런 독보적인 업적 덕분에 13~15대로 이어지는 가문의 후대 장인들은 모두 그의 이름만 쓰는 관행을 갖게 되었다.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노력으로 당대 국제적 트렌드에 맞춘 새로운 기형과 문양, 기법을 개발해 주목을 받고 지금껏 작업을 지속해온 것은 상찬할 만하다. 그러나 검증된 근거도 없이 족보에 조상 계보를 넣는 등 사실을 가공한다는 의혹까지 낳으면서 신화 만들기에 나서는 건 나중에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적 파행을 부를 수 있다. 2회에서 계속.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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