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조선 추월, 조선이 버린 무기로 이뤄졌다[Deep&wide]

입력 2023. 12. 11.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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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리포트입니다

‘궁극에 도달하면 서로 만나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 특정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고 나면 자연스레 인접 분야에 대해서도 혜안이 생긴다는 얘기지만, 요즘처럼 각 분야 전문성이 높아지면서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에서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낸 최중경 한미협회 회장이 ‘잘못 쓰인 한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펴낸 건 보기 드문 반전이다.

1990년대 외환위기, 2000년대 금융위기 극복과정에 힘을 보탠 최 회장은 그 과정에서 체험한 ‘국가 경영전략’이라는 인식 틀을 과거 2,000년 한민족 역사에 투영했다. 최 회장은 “한민족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되고 분단상황까지 맞게 된 건 역사의 중요한 순간 우리 지배층이 중대한 실책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일본이 조선을 앞서게 된 건, 조선의 사장시킨 제련기술을 활용해 조선이 포기한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했다. 서울 통일로 한미협회 집무실에서 진행된 최 회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다.

최중경 한미협회장이 서울 중구 한미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_역사책을 쓰게 된 동기는.

"어릴 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역사는 승자의 왜곡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논리적 추론으로 왜곡의 여지를 탐색하고 추가 사료를 발굴해 왜곡을 시정해야 올바른 역사가 보인다. 역사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를 외면하고 선악 논리를 앞세워 인과관계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펼쳐진 은폐, 왜곡, 과장, 편견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서술과 역사교육도 은폐, 과장, 왜곡,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매국노가 애국자가 되고 실패한 자를 성공한 자로 둔갑시키며 책임지는 자가 없는 기존의 역사 서술은 국민들이 공동의 목표와 가치를 위해 헌신할 의욕을 꺾는다."

_우리 역사 서술의 대표적 왜곡 사례를 꼽는다면.

"조선 고종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고종에게 덧씌워진 독립 투사 이미지를 다시 봐야 한다. 동학군을 진압해 달라고 청군을 불러들여 일본군의 한반도 상륙 구실을 스스로 내준 이가 고종이다. 자신과 외척 민씨 가문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무분별하게 외세에 의존하려 했던 용렬한 군주다."

_우리 현대사를 결정지은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꼽아달라.

"현재 우리 민족은 만주를 잃고 한반도로 밀려난 뒤, 분단상황까지 맞고 있다. 이는 과거 4, 5개가량의 역사적 변곡점마다 지배층이 선택한 국가대전략이 주변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슬러 꼽아본다면 △고구려의 방관 속에 멸망한 백제 △만주 회복 기회를 걷어찬 위화도 회군(1388) △청과 협력해 만주에 진출할 수 있었던 병자호란(1636) △청의 속방을 자처했던 임오군란(1882) △상해 임시정부의 태평양전쟁 미참전이 그것이다.”

_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많이 다르다. 백강전투부터 설명해달라.

“고구려와 백제의 몰락으로 민족의 활동 무대가 축소되고 만주 대륙의 주도권이 흔들리는 상황을 초래한 건 신라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고구려 리더들이 최대 위험을 미리 인지해 642년 대야성 전투(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전사한 전투)의 결과를 놓고 백제에 강력히 경고하는 한편, 신라를 보듬어 더 이상의 군사적 위협이 없을 거라고 안심시켰다면 660년과 668년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배후 도움이 없었다면 당은 결코 고구려나 백제를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배우 박해일이 '인조' 역을 연기하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_위화도 회군과 병자호란은.

“14세기와 17세기 중국 왕조 교체기에 우리 민족은 다시 만주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다. 1388년 고려 우왕과 최영이 주도한 요동정벌은 공민왕 시절인 1370년 이미 점령한 바 있는 요동성에 다시 진출해 요동지배권을 확립하려는 군사작전이었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지만, 당시 요동에 대한 명의 지배권은 확고하지 않았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북으로 쫓겨간) 원나라가 고려와 합세해 명나라를 공격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신경 쓰였을 것이다. 고려가 요동을 점령한 후 우리 옛땅을 되찾은 거라고 설명하고 명과 조공관계를 맺었더라도 주원장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명청교체기에도 조선이 청군과 연합해 명군을 공격했더라면 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광해군의 중립외교 노선을 버리고 명나라 편에 서서 청나라를 적대시함으로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화를 자초했다.”

_임오군란 전후 19세기말 아쉬운 대목이 있다면.

"19세기 후반 조선은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신미양요, 거문도 사건 등을 겪었다. 역사교과서는 신미양요는 서양 세력과의 무력충돌로 거문도 사건은 거의 다루지 않지만, 두 사건 은 조선의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처럼 영국, 미국과 가까워져 급성장할 기회를 놓쳤다. 1871년 신미양요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침몰사건의 책임을 묻는 목적보다는 조선을 개항해 교역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지만, 조선 조정이 오판해 선제포격을 하는 바람에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188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도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과 협력관계를 맺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영국의 국제적 위상과 러시아 견제정책을 파악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이 2년 점령 기간 중 적극적 교류를 시도하지 않은 실책을 저질렀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침공 위협에 놓였던 태국이 영국을 끌어들여 영ㆍ프의 중립지대로 남으며 독립을 보전했던 사례를 재연하지 못했다."

거문도에 상륙한 영국 해군 장병(왼쪽)과 거문도 앞 해상에 정박 중인 영국 전함 페가수스. 영국해군 자료사진

_상해 임시정부의 실책도 언급한 바 있다.

"상해 임시정부가 전략적으로 영민하게 대응했다면 한반도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2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26개 연합국이 ‘중국 전구(戰區)’ 성립을 발표했다. 중국 전구 최고사령관에 장제스가 임명되고, 참모장은 미국 육군 중장 조셉 스틸웰이었다. 중일전쟁이 미국 통제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상해 임시정부가 미국을 잘 설득했다면, 즉 장제스와 마오쩌둥 군대에서 일본과 싸우던 조선 청년들을 선발해 태평양 전선으로 보내겠다고 제의했다면 우리는 전후 승전국 지위를 얻고 남북 분단도 막을 수 있었다."

_근세 일본의 발전에 조선이 버린 기술이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조선 연산군 시절 함경도 단천 광산에서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은광석 제련에 획기적 기술이 발명되었다. 연산군이 기술자들을 왕궁으로 초대해 치하할 정도였다. 당시 유럽, 남아메리카, 중국을 잇는 삼각무역의 결제통화가 은이었기에, 은을 효율적으로 제련해 생산량을 늘리는 건 국가의 부강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세력은 단천광산을 폐쇄했다. 은이 많아지면 사치 풍조가 생긴다는 이유였다. 조선이 버린 기술은 일본으로 흘러갔다. 일본은 이 기술을 이와미 광산에 적용, 세계 은의 3분의 1을 생산하는 국가가 됐다. 당연히 일본이 국제무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졌다. 게다가 조선이 명나라를 본받아 해금정책을 취하는 바람에, 동아시아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진출해 아시아 무역의 중심에 서게 됐다."

_이런 잘못된 결정들에서 배우는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17세기 명청교체기 국가전략의 실패는 국제 안보문제를 국내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푸는 실책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인조반정 세력이 국내 정치적 이유로 시대역행적 친명반청 정책을 펴면서 국가적 위기를 자초했다. 대외 안보에서는 초당적이고 일관된 대응이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나토 창설 과정에서도 아서 반덴버그 미국 상원외교위원장은 반대 정파인 트루먼 대통령과 적극 협력했다. 그는 "국제 안보문제에 국내 정치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국제환경에서 조선과 일본이 취한 대응을 비교하면 국가 대전략의 품질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해 경쟁이 없는 사회, 승자가 정해져 있는 사회였다. 그런 사회는 발전하기 어렵다. 또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폐쇄된 사회도 발전하기 어렵다. 인재 양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중경 한미협회장이 서울 중구 한미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최중경: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하와이대 경제학 박사. 제22회 행정고시에 합격.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 국제금융국장, 세계은행 이사, 기획재정부 제1차관, 주 필리핀 대사,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지식경제부 장관,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역임. 현재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 제8대 한미협회 회장. 저서로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청개구리 성공신화'가 있다.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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