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벤다던 남해현령 유임시키고…난데없이 경상수사 압송
- 수군지휘관 황당 인사에 탄식
- 조정 끌려가는 배설 직접배웅
- 모친 완쾌했다는 소식에 기쁨
- 충청수사는 병이 깊어져 걱정
- 부하 생일 국수 만들어 잔치도
6월10일[7월16일] 맑음.
새벽에 탐후선을 본영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세 조방장, 충청수사,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광주의 군량 39섬을 받았다.
6월11일[7월17일] 가랑비가 오고 큰바람이 불었다. 아침에 원수 군관 이희삼이 돌아갔다. 저녁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광주의 군량을 훔친 도둑놈을 가두었다.

6월12일[7월18일]
가랑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아들 울이 들어왔다. 어머니의 병환이 좀 덜하다고는 하나 연세가 아흔을 바라보는 데다 이런 위험한 병(이질)에 걸리셨으니 염려를 놓을 수 없다. 또 눈물이 난다.
6월13일[7월19일] 흐림.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을 잡아 오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그 후임으로는 조방장 권준이 임명되었다. 남해현령 기효근은 얼마 전에는 효수해야 한다 하다가 그대로 유임되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배설에게 가서 만나 보고 돌아왔다. 어두워서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배설을 잡아갈 금오랑(금부도사)이 이미 본영(여수) 안에 와 있다고 했다. 또 별좌(5품 관직, 아마 가족 중의 누구를 지칭한 듯)의 편지를 보니 어머니 병환이 차차 나아간다고 한다. 다행, 다행이다.
※ 당시 수군 지휘관들에 대한 인사만 보아도 나라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임진전쟁 중에 충청, 경상수사가 4, 5차례나 바뀌고 남해현령 기효근은 참수하여 효시하라는 명령이 내렸다가(4월 20일, 22일 일기 참조) 유임이 되고마니 그는 경악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이순신과 전라우수사(이억기)만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나라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6월14일[7월20일]
새벽에 큰비가 왔다. 사도첨사가 활을 쏘자고 청하여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다 모였다. 늦게 비가 멎고 날이 개어 활 12순을 쏘았다. 저녁에 금오랑이 경상수사 배설을 잡아가려고 들어왔다. 권준을 수사로 임명한다는 조정의 공문과 유서와 밀부(密符)도 같이 왔다.
6월15일[7월21일]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올렸다. 식후에 포구로 나가 배설을 송별했다. 마음이 울적했다. 아들 울이 돌아갔다. 오후에는 조방장 신호와 함께 활 10순을 쏘았다.
6월16일[7월22일] 맑음.
대청에 나가 앉아 공무를 봤다. 순천의 7호선장 장일이 군량을 훔치다가 잡혀 왔으므로 처벌했다. 오후에 두 조방장과 미조항첨사 등과 함께 활 7순을 쏘았다.
6월17일[7월23일] 바람이 종일 불었다. 경상수사(권준), 충청수사(선거이), 두 조방장과 같이 활을 쏘았다.
6월18일[7월24일]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진주의 유생 유기룡 및 하응문이 군량 운반을 자원하므로 쌀 5섬을 주어 보냈다. 늦게 조방장 박종남과 함께 활 15순을 쏘고 헤어졌다.
6월19일[7월25일]
비가 계속 왔다. 홀로 수루 위에 앉아 있는데 뜻밖에도 아들 면이 윤덕종의 아들 운로와 같이 왔다. 이편에 온 어머니의 편지를 보니 병환이 완쾌되셨다고 한다. 천만다행이다. 신홍헌 등이 들어와서 보리 76섬을 바쳤다.
6월20일[7월26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종일 수루에 앉아 있었다. 충청수사(선거이)가 병이 들어 말이 분명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직접 가서 보니 중태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많이 상한 것 같다. 바람 많고 습기 많은 곳에 기거함으로 일어나는 병이니 어찌하랴만 무척 염려가 된다.
6월21일[7월27일] 맑음.
몹시 덥다. 식후에 나가 공무를 봤다. 신홍헌이 돌아갔다. 거제현령(안위)이 또 왔다. 경상수사(권준)가 보고하는데, 평산포만호(김축)의 병이 심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내어보내도록 조치했다.
6월22일[7월28일] 맑음.
할머니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6월23일[7월29일] 맑음.
두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저녁에 배영수가 돌아갔다.
6월24일[7월30일] 맑음.
전라우도(右道)의 각 고을과 포구의 여러 전선(戰船)들을 조사해 윤락녀 12명을 잡아 처벌하고 그 대장(隊長)도 함께 처벌했다. 저녁나절에는 침을 맞아 활을 쏘지 않았다. 허주, 조카 해가 들어왔다. 전마(戰馬)도 왔다. 기성백의 아들 징헌이 그의 서숙부 경충과 함께 왔다.
6월25일[7월31일] 맑음.
원수(권율)의 공문이 왔다. “세 위장(衛將)을 세 패로 나누어 보내라”고 하였고, 또 “소서행장이 일본에서 왔고 화친은 이미 결정됐다”고 한다. 저녁에 조방장 박종남과 함께 충청수사 선거이의 거처로 가서 그의 병세를 보니 이상한 일이 많았다.
6월26일[8월1일] 맑음.
식후에 공무를 보고 활 15순을 쏘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만났다. 오늘이 권수사의 생일이라 해서 국수를 만들어 먹고 취하도록 술도 마셨다. 거문고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전시 진중에서도 그가 부하 장수에 대해 생일잔치를 해준 것이 재미있다. 생일에 국수를 먹는 것은 오래된 풍습인 것 같다.
6월27일[8월2일] 맑음.
허주, 조카 해, 기씨, 운로 등이 돌아갔다. 나는 신 조방장, 거제현령과 함께 활 10순을 쏘았다.
6월28일[8월3일] 맑음.
나라 제삿날(명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6월29일[8월4일] 맑음.
일찍 대청으로 나갔다. 우수사가 와서 활 10여 순을 쏘았다.
6월30일[8월5일] 맑음.
문어공이 날삼(生痲)을 사들일 일로 나갔다. 이상록도 돌아갔다. 늦게 거제현령, 영등포만호가 와서 만났다. 방답첨사, 녹도만호, 신 조방장과 활 15순을 쏘았다.
을미년(1595년) 7월
을미년 여름 더위 속에서도 통제사의 일상은 전 달과 다름없이 지나간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군의 기강은 점점 해이해져 가고, 그 가운데서 군비 강화와 군량 확보를 위한 통제사의 고민은 깊어진다. 수루와 그 옆의 활터는 그가 번민을 푸는 위로의 장소였다.
7월1일[8월6일]
잠깐 비가 왔다. 나라 제삿날(인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수루 다락에 기대어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마치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棟樑)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柱石)같은 인물이 없으니! 모르겠다,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갈지.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누웠다 앉았다 하였다.
*** 나라사랑은 나랏일에 관심을 갖고 나라걱정을 하면서 시작된다. 위 일기는 이순신의 나라사랑을 얘기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글귀다.
7월2일[8월7일] 맑음.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날이다. 지난날을 추억해보니 슬픈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저녁나절에 보통활 10순을 쏘았다. 또 철전 5순, 편전 3순을 쏘았다.
7월3일[8월8일] 맑음.
아침에 충청수사에게로 가서 문병하니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늦게 경상수사가 와서 서로 이야기한 뒤에 활 10순을 쏘았다. 밤 10시쯤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편안하시긴 하나 입맛이 없으시어 잘 잡숫지를 못 한다고 한다. 몹시 답답하다.
7월4일[8월9일] 맑음.
나주판관(元宗義)이 배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왔다. 이전(李筌) 등이 노 만들 나무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식사한 뒤에 대청으로 나갔다. 미조항첨사와 웅천현감이 와서 활을 쏘았다. 군관들은 향각궁(한우뿔로 만든 활)으로 내기활을 쏘았는데, 노윤발이 1등을 했다. 저녁에 임영과 조응복이 왔다. 양정언은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7월5일[8월10일] 맑음.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았다. 늦게 박 조방장, 신 조방장이 왔다. 방답첨사가 활을 쏘았다. 임영이 돌아갔다.
7월6일[8월11일] 맑음.
정항과 금갑도만호와 영등포만호가 와서 만났다. 늦게 나가 공무를 보고 활 8순을 쏘았다 종 목년이 곰내에서 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7월7일[8월12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경상수사와 두 조방장과 충청수사가 왔다. 방답첨사와 사도첨사 등에게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했다. 경상우병사에게 임금님의 분부가 내려왔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나라의 재앙이 참혹하고, 사직에 원수가 남아 있어서 귀신의 부끄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망한 기운을 빨리 쓸어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있으니 참으로 통분하도다.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어느 누가 원한에 사무쳐 원수놈의 살을 뜯어 먹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김응서)은 적과 마주 진치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의 명령도 없이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패역한 말을 지껄이고, 또 여러번 사사로운 편지를 통하여 적의 기세를 높이고 적에게 아첨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그래서 비굴하게 적과 화친을 교섭한다는 소문이 명나라 조정에까지 퍼져 나라에 치욕을 끼치고 두나라 사이가 벌어지게 한 중죄를 짓고도 마음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도다. 마땅히 군법에 따라 사형으로 다스려도 아까울 것이 없었거늘, 오히려 관대히 용서하고 준엄히 타일러 경고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경은 오히려 제 고집을 더 부리고, 스스로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니 내가 보기에는 못내 해괴하고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 비변사의 낭청 김용을 보내어 구두로 나의 뜻을 거듭 전하니, 그대는 마음을 고쳐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는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유지를 보니 놀랍고도 황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김응서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아직까지도 스스로 회개하고 다시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만약 쓸개라도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했을 것이다.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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