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49] 살얼음이 반짝인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3. 12.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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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양진경

살얼음이 반짝인다

-첫추위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장석남 (1965~ )

첫추위는 벌써 왔는데 살얼음을 보지는 못했다. ‘논바닥’ ‘냇가’라는 단어가 정겹다. ‘논바닥’은커녕 ‘논’도 본 지 오래되었다. 기차를 타고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논을 휙휙 지나치기는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논도 밭도 냇가도 구경 못 하니 계절 변화는 달력을 넘기거나 ‘오늘의 날씨’를 검색해야 실감 난다.

5행의 “개밥 그릇”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개밥 그릇만 봐도 무서워 멀리 도망갔다. 개를 키우는 친구 집에 갈 때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개 붙잡아 둬”를 애걸하곤 했는데, 내가 저를 무서워하는 줄 어떻게 알고 친구네 강아지는 나만 보면 크게 컹컹 짖었다.

“개밥 그릇” 뒤에 “개 발자국 아래”를 붙인 게 신의 한 수. “가장 낮은 자리”와 “왕관”의 대비도 근사하다. 왕관보다도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반짝이는 살얼음이 아름답다는 역설. 시보다도 예술보다도 자연이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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