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 자급률 5%? 이거 다 사기인 거 아시죠?”
벼 수확을 마친 2023년 11월 전남 구례군 광의면은 갈색·초록색·노란색 세 가지 색이다. 드문드문 젖은 흙색은 갈아엎은 밀과 보리를 심은 농토다. 보름 뒤가 되면 파릇파릇 초록으로 덮일 것이다. 한쪽으로 벌써 보이는 초록은 10월에 벼가 서 있을 때 파종(입모종살포)한 조사료(라이그래스 등 가축사료)용 농토다. 절반 넘는 농토에는 베어낸 벼의 메마른 밑동이 그대로 남아 누렇다. 이 노란색은 겨우내 그대로일 것이다. 각각의 색에 농부들 저마다의 사정이 담겼다.
“정부는 2030년까지 우리밀 자급률 10%(약 25만t)를 달성한다는데 달성 못합니다. 100% 장담합니다. 밀 심으면 농사를 한 번 더 짓는 겁니다. 소득이 늘어납니다. 심고 싶죠. 그런데 밀이고 조사료고 생산해놓아도 팔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렇게 그냥 땅을 묵힙니다.”
2023년 11월7일 오전 밀밭 두둑에서 세 가지 색의 풍경을 바라보던 최용범 우리밀가공공장영농법인 총괄본부장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구례 우리밀가공공장은 유일한 하루 처리량 10t 이상의 중급 규모 국산밀 제분시설이다.
‘백중밀’ 사태를 아십니까
2022년 기준 구례군 논면적 2207㏊(약 667만 평) 중 겨울철 농사를 짓지 않는 비율은 53.7%(1185.5㏊)였다(구례군청). 충청 이남에서 ‘벼·밀 이모작’이 가능하지만 대부분 농토가 겨우내 방치된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 경지이용률은 107.2%로, 산술적으로 7.2%의 농토만 1년에 두 번 쓰인다는 의미다.
구례군의 밀농사 면적(171.5㏊·7.8%)도 얼마 안 된다. 전국적으로 보면 경지면적(152만8237㏊·2022년) 대비 밀 재배면적(1만1600㏊·2023년)은 0.8% 수준이다. 민간 수매처가 버티고 있는 전남북과 경남이 주생산지다.
곡물자급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인 18.5%(2022년 기준)인 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국민 1인당 36.0㎏을 먹는 ‘제2주식’ 밀의 자급률은 1% 수준이다. 한 해 밀 수입량만 257만8646t(식용 기준)에 이른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국산밀(우리밀)을 팔 곳이 없다. 뭔가 잘못됐다는 농업계·정부의 공통된 문제의식 아래 2019년 8월 밀산업육성법이 제정(2020년 2월 시행)됐다. 식량자급을 목표로 농업정책을 펼치는 정부 부처(농림축산식품부)가 법의 수행기관이다. 그런데 국산밀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우리나라 식량정책의 적나라한 현주소다.
풍년이 들면 밀농가의 근심이 깊어진다. 손주호 국산밀산업협회 이사장은 “4만2천t보다 더 생산되면 국산밀은 창고에서 썩어가고 가격이 폭락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4만2천t은 실제 소비되는 2만2천t에, 정부가 수매하는 2만t을 합친 양이다. 당장 2023년 봄 생산량이 한 해 전(3만5천t)보다 48.6%(5만2천t, 농식품부 추정) 늘어나자 대란이 일기 직전까지 갔다. 정부가 세운 2023년 목표치인 ‘8만t’에 크게 밑도는 수확량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2017~2018년 ‘백중밀 사태’까지 가지 않았다. 두 해 연속 밀이 3만7천~3만8천t가량 생산됐는데 밀농가들은 팔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정부가 보급한 백중밀 종자를 대대적으로 심은 것이 화근이었다. 생산량은 다른 품종에 비해 30~40% 높지만 글루텐 함량이 낮았다. 혼합제분이 불가피한 국산밀의 사정은 전체 국산 밀가루의 품질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 사태는 ‘국산밀은 국수 만들기도 힘들 정도로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을 남겼다.
이때 결국 농식품부가 한국주류산업협회를 ‘소방수’로 투입했다. 주정(희석식 소주의 원료) 용도로 국산밀을 사들이게 한 것이다. 농식품부는 주정용 타피오카 등의 농산물 수입물량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주정업계 쪽에는 ‘갑’이다. 2023년에도 5년 만에 주류산업협회가 국산밀 1만3600t을 주정용으로 사들였다. 2019년 정부 수매제 부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 밀농가와 밀 유통·가공업계에 충격이 컸다. 정부 수매로 이뤄지는 비축물량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현재 4만t 이상 창고에서 묵히고 있다. 2020~2023년 보관료만 33억여원이 투입됐다.
농부는 근심하는데 농식품부만 해맑다
밀의 생산과 소비까지 담당해야 할 농식품부는 농민의 근심과 상관없이 ‘해맑다’. 밀 생산량 증대에 대한 보도자료(2023년 6월29일치)를 내어 ‘밀 자급률이 2% 수준으로 높아질 전망’이라고 환영했다. 밀산업육성법(제17조)은 농식품부 장관이 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 급식에 국산밀이나 국산밀가공품의 우선 구매를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하지만 그런 요청도, 국산밀 사용 사례도 드물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농민들과 달리, 국산밀 소비 확산 현장에 농식품부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최강은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장은 “실제 빵·국수 등으로 이용되는 ‘밥상용 밀’만 치면 밀 자급률은 1% 미만”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목표를 설정했으면 달성하려고 수입밀을 국산밀로 대체해서 수요를 늘려야 하는데, 밀 수입하는 대기업들 눈치만 봅니다. 소비 확대를 어떻게 할지 유통과정에서 뭘 할지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생산량) 수치만 늘려놓고 보여주기식이에요. 2025년 밀 자급률 5%? 2030년 10%? 이거 다 사기 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정부가 국산밀을 살릴 의지는 있을까. 송동흠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 운영위원장은 “정부의 기본계획은 ‘수첩’ 수준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기본적인 생산·소비 전망도 나오지 않아요. 생산이 제분과 연결해서 상품으로 이어져야 품질도 오르고 소비가 늘어날 텐데 (농식품부는) 품질 향상을 위해 생산에만 치중하고 있어요. 또 ‘소비 촉진을 위한 홍보’는 하는지 몰라도 소비가 실제 촉진되도록 하는 (수입밀·국산밀) 가격 차이 지원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밀산업육성법(제6조)은 정부가 밀산업 종사자에게 현재 △수입밀 업체의 수익률 △생산비 △투자처 등 실태조사를 할 수 있도록 규정했지만, 정부가 이런 정보를 요청한 적이 없다. 정부 기본계획이 ‘빈 껍데기’라고 지적되는 이유다.
김태완 한국우리밀농협 상무는 “세부 실천 계획이 다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자급률 3%면 학교급식용 밀은 국산밀로 대체한다든지, 5%일 땐 공공기관 급식까지 가고, 7%면 군부대까지 공급한다는 식의 세부 실천 계획이 나와야 하지만 기본계획에는 이런 구체성을 찾아볼 수 없다.
“국산밀을 사료 취급”
경남도의 경우 초·중·고교 급식으로 기존 친환경 쌀을 공급하는 국비보조사업 예산 43억원에 더해, 친환경 농산물 예산 28억원을 추가해 국산밀을 일부 포함하도록 생산자단체와 ‘2024년도 예산안’ 편성을 협의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의 긴축재정 기조로 전액 삭감됐다. 허태유 경남우리밀생산자협의회 사무국장은 “기존 예산도 줄이는 판국에 신규는 안 된다”는 말을 도청에서 들었다고 한다.
“경남교육청 관할 학생들이 학교에서 우동·소면·자장면 등으로 한 해 먹는 수입밀이 1840t입니다. 경남에서 생산되는 우리밀의 50%가량이에요. 밀 가공식품 기준으로 우리밀 가격은 수입밀보다 불과 1.8배(㎏당 3410원 차이)밖에 차이 나지 않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수입밀 대신 학생들에게 안전한 우리밀을 먹게 하고, 그 부분을 정부가 지원하면 건강도 챙기고 국산밀 생산에 큰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국자들을 만나보면 지원이 어렵다고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밀은 다른 농산물처럼 원형이 아니라 제분을 통해 가공됐다고, ‘농민한테 도움이 되는 것 맞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우리밀 가공업체가 살아야 농민이 사는 거 아닌가요. 이제 법적 근거도 있으니 각 시·도에서 우리밀 지원 조례를 만들어서 지원하도록 농식품부가 나서면 좋을 텐데….”
손주호 이사장은 농식품부의 지원을 질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쥐꼬리만 한 농업예산에서 가루쌀에 쏟아붓고 나니(상자기사 참조), 국민이 세끼 중 한 끼 먹는 밀은 사료 취급합니다. 2017년 백중밀 사태를 겪으면서 하도 안 팔리니까 농민들이 자청해서 밀 수매가격을 4만2천원에서 2018년 3만9천원으로 낮췄어요. 그런데 이게 6년째 같은 값이에요.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소농들은 인건비도 잘 안 나옵니다. 2022년 초 농민들과 문재인 정부가 식량안보직불금 200만원(㏊당) 책정을 논의하다가,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이 취임하더니 다 없던 일이 되고 갑자기 가루쌀 얘기를 꺼냈어요. 날벼락이었죠.”
농촌진흥청 ‘농산물 소득자료집’을 보면 0.1㏊(302.5평)당 밀농가의 소득(총수입-생산비)은 2018년 +2만3320원, 2019년 -6705원(적자), 2020년 -7만3413원(적자), 2021년 +10만4970원, 2022년 +7만7946원 등으로 나타났다. 송동흠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 운영위원장은 “농민들은 자기 인건비를 빼고 이익을 계산하는 경향이 있어서 분명히 적자인데도 계속 농사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격이 문제인데 생산 타령만 하는 정부
‘개인 소비자 대상’ 소비 촉진에만 매달리는 정부 정책의 방향 설계를 기초부터 다시 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한국농수산유통공사(aT)의 ‘2022년 가공식품 세부시장 현황’을 보면 국내 유통되는 밀의 95%가 라면·제빵·제과 등 대기업 식제품제조사(60%)와 마트·프랜차이즈식당 등 중소기업(30%) 같은 ‘가격에 민감한’ 기업을 통해 소비된다. 그럼에도 정부는 ‘건강하고 안전한 우리밀’ 타령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 소비자 역시 가격에 민감하다. 2022년 ‘농업·농촌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국민 2578명 조사) 결과를 보면 ‘국산 농산물이 비싸면 수입 농산물을 사먹겠다’는 응답이 40.4%였고, ‘그래도 국산을 사먹겠다’는 응답은 28.6%였다. 2010년 같은 조사의 결과(28.3% 대 45.1%)와 정반대였다.
일본의 경우 농가에 대해 ㏊당 600만원대 지원 등 재정을 투입해 자국산 밀 가격을 수입밀과 비슷하게 맞춘다.(38쪽 기사 참조) 이에 대해 김보람 농식품부 식량산업과장은 “기본적으로 농산물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일본은 직불금을 엄청 많이 지급해 농민이 싸게 밀을 팔도록 해서 가격을 낮추는 방식을 취하는데, 결국 재정적 부담 등의 문제로 우리도 똑같이 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농식품부도 기업들과 만나서 국산밀 소비를 조금씩 늘려가도록 하고 있는데, 농민이 원하는 만큼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기후위기로 국제 곡물 가격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식량안보 문제를 시장 논리로만 접근하는 나라는 없다. 우리의 밀농업이 전멸하는 계기가 된 1950년대 미국의 밀 원조도 남아도는 자국산 밀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처럼 국토의 70%가 산지이면서 농업 강국들로 둘러싸인 스위스는 농업 공공성을 국민투표(1996년 6월)로 헌법에 못박았다. 스위스헌법(제104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유경제의 원칙에서 벗어나 농민의 토지 경작을 지원한다.’ 2018년 기준 스위스의 곡물자급률은 45.0%로 우리나라의 두 배 이상이다.
“식량은 국가의 존립 근거입니다. 식량자급률은 경작지 문제, 인구제도 등이 연계돼야 지켜질 수 있습니다. 통제가 어려운 기후위기 시대에 국가가 식량자급을 포기하는 순간 되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국가는 식량을 공공재로 인식해 다양한 지원을 해야 합니다.”(백혜숙 지속가능국민밥상포럼 대표)
송동흠 위원장은 언 발에 오줌 누기식 접근이 국산밀 소비를 ‘2만t 트랙’에 갇히게 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호주) 등 우리의 수요 수입국은 수천 개의 밀 품종을 대량으로 블렌딩해서 라면회사들이 원하는 품질을 세세하게 맞춰 균질하게 제공하는데, 우리는 4종 정도 되는 밀 품종을, 그것도 3천~5천t을 열 번에 나눠 제분한다. 강력·중력·박력 구분도 잘 안 되는 이유다. 저쪽은 팬텀기로 덤비는데 활로 맞서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밀산업의 특성상 최소 20만~30만t은 돼야 기본을 맞출 수 있다. 전년 대비 예산을 얼마 늘리는 식으로는 대응이 안 된다. 국가 무제한 수매제 도입 등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국산밀 관련 생산자와 가공·유통업체 쪽은 이미 가격경쟁력을 위한 직불금 규모를 ㏊당 250만원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밀 재배면적(2023년 1만1160㏊)을 고려하면 290억원의 재원만 있으면 된다. 김태완 상무는 “지금 정부 직불금은 국산밀 가격을 1천~2천원 떨어뜨리는 정책인데, 시장에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친다. 밀 직불금이 가루쌀처럼 250만원이 되면 1만8천원가량 인하 효과가 있다. 이렇게 되면 수입밀과 가격경쟁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상 허용된 농업보조금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 2009~2018년 허용된 WTO 농업보조금은 82조6388원 가운데 11조1686억원(13.5%)만 사용했다.
수출 1조원 ‘K라면’? 사실은 미국·호주산
국산밀 가공·유통 회사 네니아㈜의 문영진 대표는 정부의 밀 정책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신라면에 투입되는 밀이 한 해 7만t인데, 정부가 정책 드라이브를 걸어 5만2천t을 생산한다는 건 사실 창피한 일 아닌가요? 밀 관련 세미나 등에 가면 정부 쪽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국산밀이 품질이 안 좋다고 핑계를 댑니다. 주변 원인이 본류인 것처럼 포장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밀 특성도 있고 이미 품종 등도 많이 따라왔다고 봅니다. 2019년 저희가 광화문에서 서울시 협조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는데, 국산밀 식품에 대한 호응이 더 좋았습니다.” 문 대표는 “최근에 ‘라면 수출 1조원 돌파’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데, 케이(K)푸드 수출용 라면이란 게 전부 미국·호주산 수입밀을 쓰는 것 아닙니까. 기가 막힌 일입니다. 케이푸드라고 이름 붙이는 라면에라도 국산밀을 넣게 해야 하지 않나요?”라며 “농식품부가 자신의 정책 실패를 반성하진 않고 농민 탓만 하는 것 같아 참 비정하고 비열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라고 꼬집었다.
며칠 전 파종한 한 이웃의 밀밭을 이날 확인해보니, 이틀 전 내린 큰비로 물이 차 있었다. 최용범 본부장은 아침부터 작업한 배수로를 확인했다. 오래 지었다고 거저 지을 수 없는 게 농사다. 농부는 매일 작물과 농토를 확인하고 고민해서 대처한다. 최 본부장이 말했다. “지금은 괜찮은데, 5~6월에 저렇게 물이 차면 뿌리가 썩습니다. 물이 잘 빠지게 배수로 파는 법 같은 걸 연구해서 공유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벼 베고 바로 파종했는데, 요즘은 날씨가 따뜻해져서 12월 초까지도 파종해도 됩니다.” 우리밀가공공장은 밀 파종 뒤 밑밭을 적절히 밟아줘서 밀 수확을 늘리는 ‘밀 밟기’를 개발해 전국적으로 퍼트리기도 했다.
사실 1982년 밀 수입 자유화, 1984년 밀 정부 수매 중단으로 자급률이 0%(1990년 국산밀 생산량 889t)에 수렴할 수준으로 곤두박질친 국산밀 농업을 살려낸 것은 시민이었다. 1966년 만들어진 (사)가톨릭농민회의 ‘1세대 회원’들이 1989년 국산밀 종자 14㎏씩을 들고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등 3곳에 파종하면서 일어난 ‘우리밀살리기 운동’이 무덤까지 갔던 국산밀을 살려낸 유일한 동력이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박목월 ‘나그네’) 같은 그 흔했던 겨울철 푸른 밀밭을 되살리려는 농민운동이 있었다.(36쪽 기사 참조)
그 흔한 푸른 밀밭, 다시 볼 수 있을까
같은 날 점심은 우리밀가공공장 근처 식당 ‘돌담’에서 팥칼국수를 먹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밀을 수확하면 동네 방앗간에서 밀을 찧어 이웃들과 꼭 팥칼국수를 나눴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밀이라는 표시가 어디에도 없었다. “구례에서는 우리밀이 기본”이라는 게 구덕순 식당 사장의 설명이다. 이렇게 구례에선 우리밀 찾기가 어렵지 않다.(42쪽 기사 참조)
구례읍으로 이동해, ‘목월빵집’에 들렀다. 역시 우리밀 표시는 없었다. 이곳은 밀기울(껍데기)과 씨눈까지 몽땅 제분한 전립분 국산밀을 활용한 제빵법으로 유명하다. 2016년 문을 열어, 지금은 줄 서서 빵 사는 명소가 됐다. 직원만 24명. 장종근 사장은 “밀이 원래 우리 것임을 말하고자 박목월 시인 이름을 따서 ‘목월빵집’이라 지었다”고 말했다. 그는 “밀농업 자체를 장려해도 1%밖에 안 되는 자급률이 오를지 의문인데, 가루쌀로 지원이 이분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우리밀 고유의 풍미를 살려 차별화한 게, 가격은 다른 빵집보다 비싸도 손님이 많이 찾는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격에 대해 정책적 지원만 있다면 대기업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밀살리기운동 33년, 비정하게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농민들은 올해도 찬 바람에 맞서 밀 파종을 마쳤다.
구례(전남)=글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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