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귀부인 돌려주세요” 1500억 몸값의 여인…누군가 봤더니[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입력 2023. 12. 10.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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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는 작품>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Ⅱ
유디트 Ⅰ
.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되찾은 숙모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저는 단지, 빼앗긴 걸 되찾았을 뿐이에요."

2006년 1월17일.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나온 아흔 살의 마리아 알트만이 주변인들에게 꺼낸 말이었다. 침착한 표정의 그녀는 제법 흔들림 없이 섰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북받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장장 8년이었다. 나치가 납치한 '숙모'를 데려오기 위해 쏟은 세월이었다. 참 외로운, 끝없이 지난한 여정이었다. 알트만은 숙모를 되찾기가 이렇게나 힘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도 원래 소송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약탈한 것을 제자리에 두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 하나 예외가 될 건 없었다. 그러나 알트만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그녀의 숙모만은 풀어주지 않았다. 나치에 불법으로 넘겨받은 게 분명하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오스트리아의 태도가 조금만 달랐다면, 알트만은 그런 조국에 숙모를 계속 맡길 생각도 있었다. 진심 어린 사과, 약간의 보상만 있었어도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 수 있었다.

"알트만 씨. 돌려받은 그녀를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기자의 물음에 알트만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이날, 전 세계의 매체가 조카 알트만에게 돌아간 숙모를 소개했다.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이 여인을 한껏 조명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

알트만이 품에 안은 숙모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의 그림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이었다. 알트만과 오스트리아는 살아있는 아델레가 아닌, 그녀 초상화의 소유권을 놓고 기나긴 싸움을 이어간 것이었다. 그림은 분명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금박과 색색의 유리를 쏟아부은 작품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몽롱한 눈과 상기된 뺨, 가는 손목과 가는 손가락, 가녀린 어깨와 움푹 파인 쇄골의 아델레에게는 성녀와 요녀의 모습이 번갈아보였다. 형형색색 드레스가 그녀의 우아함과 농염함을 더했다. 이 그림은 틀림없이 세기의 대작이었다. 오스트리아가 그녀를 꽉 붙잡고 있던 궁극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알트만은 어떻게 그런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겨 그녀를 데려올 수 있었을까. 이보다 앞서, 이 그림에는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토록 밀도 높은 작품성을 갖고 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시간을 앞당겨 숙모 아델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은밀한 사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910년경 [Wikimedia]

클림트의 금박 속 여인, 아델레는 1881년 오스트리아에 터를 잡은 부유한 유대계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났다.

부모를 따라 요조숙녀로 본분을 다해야 한 아델레는 어릴 적부터 여러 교양을 쌓았다. 그녀는 어머니 손을 잡고 사교계에 데뷔했다. 어느덧 돈 많은 요부(妖婦)의 인상까지 갖추게 된 아델레는 혼자 살롱을 꾸릴 만큼 원숙해졌다. 훗날 오스트리아 공화국 대통령에 오르는 카를 레너, 유명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등이 그녀 살롱에 단골이었다고 한다. 아델레는 곧 자기보다 열여덟 살이나 많은 사업가와 결혼했다. 설탕 제조업으로 성공한 페르디난트 블로흐였다. 둘의 공통 관심사는 문화 예술이었다. 돈도 많고, 발도 넓은 둘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 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가 바로 클림트였다. 강렬한 금박과 화려한 색채로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부부는 지금도 유명한 이 사내가 훗날에는 더 위대해질 것임을 확신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팔라스 아테나'

아델레는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간 여러 남자의 추파를 받아봤던 그녀는 클림트 또한 자신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델레는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녀에게 휘파람을 불던 신사들과 달리 클림트는 말도 어눌하고, 글은 더 조악했음에도 그랬다. 알고 보면 답 없는 바람둥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 또한 개의치 않았다. 아델레는 클림트의 소년 같은 진솔함이 좋았다. 이미 남편이 있는 그녀였지만, 이 사내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클림트에게 당신의 초상화를 부탁할까 하오." 1889년의 어느 날, 페르디난트가 아델레에게 넌지시 물었다. "좋아요." 아델레는 애써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그녀의 심장은 쿵쿵 뛰었다. 서른일곱의 클림트, 열여덟의 아델레는 그렇게 작업실에서 단둘이 마주할 수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에 대한 연구'

1900년부터 1907년.

클림트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을 구상하고 완성하는 데 무려 7년의 세월을 썼다. 쉬엄쉬엄 그리지 않았다. 외려 선 하나, 칠 한 번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1903년을 전후로 그가 내놓은 예비 스케치만 100점이 넘었다. 그렇기에 이만큼의 세월이 걸렸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화가였던 클림트는 일 년에도 그럴듯한 그림을 수십 점씩 그릴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이 작품에는 각별한 정성을 쏟았을까.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가가 모델과 사랑에 빠졌고, 모델 또한 화가를 사랑하게 된 탓일 터였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Ⅰ'

애초 서로에게 호감이 있던 둘이었다.

오직 서로가 서로만 봐야 하는 공간에서 그 이상 감정을 품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증거도 있다. 클림트의 1901년 작 '유디트 Ⅰ'이다. 클림트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며 동시에 아델레를 모델로 '유디트 Ⅰ'도 작업했다.

구약성서 속 등장하는 유대인 과부 유디트는 아시리아군(軍)에 포위된 마을을 구하고자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암살하는 여인이다. 과거 대부분의 화가는 그런 유디트를 고귀하고 충성스러운 여성으로 그렸다. 고혹적인 눈과 풀어헤친 젖가슴, 투명한 옷 등 유디트를 이렇게까지 팜 파탈로 묘사하는 일은 없었다. 클림트가 모델로 선 아델레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 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아델레 또한 클림트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사랑이 있었기에 이런 파격적인 포즈를 취했을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일부 확대)

클림트와 아델레가 보통 관계가 아니었다는 건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 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델레는 어릴 적 사고로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에 장애가 있었다. 그녀는 이를 콤플렉스로 여겼다. 클림트는 아델레의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며 그 부분을 덮어줬다. 따뜻한 배려였다. 클림트가 아델레의 드레스에 가득 칠한 '호루스의 눈' 문양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집트 신인 호루스의 눈 표식은 행운과 보호를 상징한다. 아델레에 대한 농밀한 감정이 없었다면 굳이 수고스럽게 이 눈을 화폭에 잔뜩 채울 필요가 없을 터였다.

클림트와 아델레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10년 넘게 지속됐다.

쉽게 질려하는 클림트도 당돌한 아델레를 두고는 매번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남편 페르디난트가 아내 아델레를 자유롭게 풀어준 점 또한 만남이 이어지는 데 영향을 줬다. 클림트는 1918년 쉰여섯 살로 먼저 죽었다. 이어 아델레는 1925년 마흔네 살 나이로 눈을 감았다. 사인은 뇌막염이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 등 클림트의 그림을 다섯 점 가량 갖고 있었다. "저는 제 남편 페르디난트를 제 모든 재산의 포괄적 수증자(受贈者)로 정합니다." 아델레의 유언이었다. "남편이 죽으면, 클림트가 그린 내 초상화는 빈에 있는 국립 미술관에 기증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그녀는 특별히 이 말을 덧붙였다.

나치의 강탈

페르디난트는 아델레에 대해 아무런 구속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페르디난트는 온기 없는 아델레의 방을 한참 동안 그대로 둘 만큼 아내를 그리워했다. 방에 걸린 아델레의 초상화도 손대지 않고, 생각날 때마다 찾아와 멍하니 쳐다봤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렇게만 조용히 시간이 흘렀으면 그녀의 요청이 자연스럽게 지켜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결과적으로는 기증이며, 선물이며 할 것 없이 강제로 빼앗기고 말았다. 20세기 최악의 예술품 약탈집단, 나치의 손아귀에 잡히고 만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1년 전인 1938년,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합병 절차를 밟았다. 유대인을 증오한 나치는 곧장 오스트리아 내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에 나섰다. 돈 많은 유대인이었던 페르디난트와 그의 가문은 당연히 핵심 표적이었다. 거듭되는 압박에 페르디난트는 결국 클림트의 그림 등 가진 대부분을 놔둔 채 스위스로 피신했다. 나치는 그런 페르디난트에게 세금 횡령 혐의를 씌웠다. 이를 명분 삼아 그가 남긴 자산을 집어삼켰다.

에곤 실레, '포옹'
오스카 코코슈카, 'The Bride of the Wind'

페르디난트의 물품을 챙기러 온 나치 일당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의 저택과 창고에서 나온 잘 닦인 클림트의 그림은 이들 눈에도 놀라웠다. 당시 전체주의 기조의 나치는 개성 강한 예술에 '퇴폐'라는 꼬리표를 달고 조롱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구 찢고, 밟고, 불태웠다. 클림트의 뜻을 따른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1886~1980)의 작품이 대표적인 희생양이었다. 그런 나치도 페르디난트가 갖고 있던 클림트의 그림은 살려줬다. 이에 대해선 나치의 수뇌부가 이 작품들을 각별히 여겼다는 설이 있다. 다만, 그림을 그대로 두지는 않았다. 나치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의 제목을 바꿨다. 유대인 여인의 이름이 쓰였다는 이유였다.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 이런 담담한 제목을 붙인 뒤 만족해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일부)'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일부)'

무자비한 나치 독일의 시대가 영원할 리 없었다.

1945년 4월, 궁지에 몰린 나치의 수장 아돌프 히틀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렇게 나치는 패망했다. 2차 대전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쯤 페르디난트는 나치의 약탈품을 되찾기 위해 사방팔방 쏘다녔다. 특히, 그리운 옛 부인의 모습이 담긴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 등 빼앗긴 클림트의 그림을 돌려받기 위해 변호사도 선임했다. 그러나 나치는 페르디난트가 그토록 돌려받고 싶어 한 그림을 제자리에 두지 않았다.나치는 클림트의 작품을 오스트리아 정부에 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를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에 걸어버렸다. 페르디난트는 결국 아내의 초상화를 다시 보지 못한 채 같은 해 11월에 생을 마감했다. "내 모든 자산은 조카들에게 남긴다." 그의 유언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Death and Life'

이제 공은 후세로 넘어갔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와 클림트의 그림 사이 어떤 사연이 있는지 구구절절 아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차츰 묻히는 듯했다.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아델레의 조카였던 마리아 알트만이 여기서부터 새로운 주연으로 등장한다. 알트만은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패션 사업을 일궈 크게 성공했다. 알트만은 여든두 살이 된 1998년의 어느 날, 한 뉴스를 접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나치에 몰수된 예술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법(문화재 환수법)을 통과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소식을 읽고 있는 알트만에게 흐릿한 옛 기억이 스쳐갔다. 나치의 총성이 일기 전 평화로웠던 때 빈에서 가득 쌓은 추억들이었다. 그 시절 알트만은 자녀 없이 살았던 페르디난트와 아델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특히 숙모 아델레는 알트만을 친딸처럼 예뻐하며 보듬었다. 알트만은 그런 숙모의 초상화가 그간 무슨 수모를 겪었고, 당장은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페르디난트가 유언장에 쓴 아델레의 조카 중 몸소 행동에 나설 만큼 재력과 여유가 있는 이는 자기뿐이라는 점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소송이 길어질 줄은
구스타프 클림트. 'The Kiss'

알트만은 오스트리아의 이번 법 제정을 신호로 봤다. 그녀는 뒤늦게나마 숙모를 되찾기로 했다.

사실 알트만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 등 빼앗긴 클림트의 그림을 완전히 돌려받기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알트만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 작품들을 한 가족에게서 불법 취득했다는 걸 인정하길 바랐다. 사과와 나름의 사례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정부는 알트만의 말을 무시했다. 정부는 "남편이 죽으면 내 초상화는 국립 미술관에 기증해달라"는 아델레의 유언을 앞세워 소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델레가 죽은 후 그림의 실소유자가 된 페르디난트는 모든 유산을 조카들에게 남긴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를 오스트리아 정부 측에도 명백히 통보한 터였다. 백번 양보해 아델레의 유언에 더 중점을 둔다 해도 이 내용은 애초 지켜지지 못했다. 때가 돼 실소유자가 직접 기증하는 것, 약탈당한 뒤 실소유자 뜻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기증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구스타프 클림트. 'The Music'

2000년, 알트만은 결국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을 찾았다.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빈 벨베데레 미술관에 있는 클림트의 그림 반환을 요청하는 소송을 걸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미국 법원이 이 소송에 나설 수 없다는 취지의 진정서를 즉각 제출했다. 분쟁이 이어졌다. 여러 요건을 따진 미국 연방대법원은 4년이 흐른 2004년, 이 소송을 미국에서 진행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 사이 여러 매체가 알트만과 오스트리아 정부 사이 다툼을 조명했다. 여론은 알트만 뒤에 섰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억지를 부린다는 식의 국제적 비난에 직면했다.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은 2006년 1월17일,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 등 클림트 그림 다섯 점에 대한 소유권이 알트만에게 있다고 판결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를 향해 이 작품들을 즉각 반환할 것을 명령했다. 이 사연을 다룬 영화 '우먼 인 골드'(2015)에서 알트만의 변호사 랜드 쉔베르크(라이언 레이놀즈 분)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전쟁을 피해 온 이들에게 자유를 줬다. 이제는 정의까지 선물하고 싶다." 그렇게 분쟁 8년 만에, 나치에 강탈되고 68년 만에 그림은 진짜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돌려받은 숙모를 팔았다?

알트만은 세기의 재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 그녀는, 얼마 뒤 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를 넘겨받은 알트만은 이 그림을 얼마간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전시되도록 했다. 그리고 고작 몇 개월 후 이 그림을 팔아버렸다. 힘겹게 받아낸 작품을 다시 판매한 데 대해 또 이목이 쏠렸다. 사들인 이는 클림트 마니아로 칭해진 미국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 창업자의 아들 로널드 로더였다. 판매가는 1억3500만 달러(당시 약 1500억원)였다. 당시 거래 사상 최고가였다.

알트만은 힘들게 품에 안은 숙모를 왜 곧장 판매대에 올렸을까.

이미 늙었던 알트만은 지난한 재판을 겪으며 더 연로해졌다. 그녀는 자기가 앞으로 얼마 살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알트만은 그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하나는 로스앤젤레스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후원하는 일, 또 하나는 마리아 알트만 가족재단을 설립해 공공·자선기관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알트만은 그림을 팔고 받은 돈 일부를 기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그녀는 끝내 한을 풀고 2011년 자택에서 숨졌다. 향년 아흔다섯 살이었다. 알트만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을 로더에게 넘기기 전 "그림을 반드시 대중에게 공개하라"는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로더가 공동 투자했던 뉴욕 노이에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또 다른 초상화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Ⅱ'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Ⅰ'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클림트는 아델레를 앞에 두고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Ⅱ'도 그렸다. 첫 초상화를 완성하고서 5년 뒤였다. 바람둥이 클림트가 평생 플라토닉(Platonic)한 사랑을 한 에밀리 플뢰게를 빼고 두 점 이상의 초상화를 그려준 건 아델레가 유일했다. 이 또한 클림트와 아델레가 특별한 사이였다는 걸 시사한다.

넓은 챙의 검은색 모자를 쓰고 회백색 가운을 입은 채 서 있는 아델레는 우아하고도 강해보인다. 때 묻지 않은 몽환적 표정은 소녀의 풋풋함을,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각선미는 처녀의 성적 매력을 끌어올린다.

알트만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오스트리아 정부에게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Ⅱ'도 함께 받을 수 있었다. 알트만은 이 그림도 넘겨받은 그해에 팔았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대에 오른 이 작품의 낙찰가는 8783만6000달러(당시 약 950억원)였다. 낙찰자는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였다. 윈프리는 2016년께 한 중국인 컬렉터에게 구매가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을 받고 재판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로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여러 특별전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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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우먼 인 골드, 사이먼 커티스

우먼 인 골드, 앤 마리 오코너, 영림카디널

그리다, 너를, 이주헌, 아트북스

누가 클림트의 그림을 소유하는가, 송호영, 법학논총, 한양대학교 법학연구소

〈후암동 미술관 작품 편 읽는 순서〉

1)“내 딸이 얼어죽을뻔 했어!” 식은 욕조에 女모델 뒀다가 소송갈 뻔한 사연[후암동 미술관-존 에버렛 밀레이 편] - 오필리아 (2023. 9. 2.)

2)“그녀 남친을 제가 죽였어요” 짝사랑 훔쳐보던 괴물, 무슨 짓을 벌였나[후암동 미술관-오딜롱 르동 편] - 키클롭스 (2023. 9. 16.)

3)“몸값만 900억원 이상!” 13명 품에 안긴 男실종사건…정말 화형 당했나[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가셰 박사의 초상 (2023. 9. 30.)

4)“그남자 목을 주세요” 춤추는 요부의 섬뜩한 유혹…왕은 공포에 떨었다[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모로 편] - 유령(환영) (2023. 10. 14.)

5)“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 페스트 (2023. 10. 28.)

6)“이리 올래?” 나체女가 급히 감춘 ‘특별한’ 신체부위…섬뜩한 실체는[후암동 미술관-존 콜리어 편] - 육지의 아이 (2023. 11. 11.)

7)“차르 축출하겠다” 반란, ‘가장 위험한 야망女’ 움직였다…그 결말은[후암동 미술관-일리야 레핀 편] - 알렉세예브나 소피아 황녀 (2023. 11. 25.)

8)“납치된 귀부인 돌려주세요” 1500억 몸값의 여인…누군가 봤더니[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2023. 12. 9.)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후암동 미술관-프로메테우스 편] (2023. 9. 9.)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후암동 미술관-판도라 편] (2023. 9. 23.)

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후암동 미술관-데우칼리온 편] (2023. 10. 7.)

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편] (2023. 10. 21.)

5)“절세미녀 셋이 있는 곳에 가쇼” 근육男은 공포에 떨었다…무슨 일[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②편]

6)“너, 내 노예가 돼라” 살인죗값 다 치렀는데…이번엔 또 웬 날벼락[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③편]

7)“나랑 3년 노예계약해” 여왕과의 동거…‘강제여장’ 굴욕까지 참았더니[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완결 편]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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