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울은 ‘호랑이’ 소굴…중국 때문에 확 늘었다고?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3. 12. 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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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호랑이’ 한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다
마지막 한반도 호랑이. 1921년 한반도 남부의 마지막 호랑이가 불국사에서 가까운 경주 대덕산에서 사살됐다. 이후 한국호랑이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왔다. 나뭇꾼을 덮쳐 상처를 입히기도 했던 이 호랑이는 마을사람들이 사살했다. 호랑이 옆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를 쓴 신사는 경주 유력자였던 고 이복우 씨. -사진/엔도 키미오. ‘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2009.
1390년, 고려 34대 공양왕(재위 1389~1392)은 송도(개경)의 기운이 다했다는 도참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천도를 추진한다. 한양에는 이미 15대 숙종(재위 1095~1105)이 완공한 남경 궁궐(연흥정·청와대 자리)이 있었다. 공양왕은 간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그해 음력(이하 모두 음력) 9월 수도이전을 단행하고야 만다. 그런데 불과 5개월만인 이듬해 다시 송도로 되돌아왔다.

귀환한 이유가 뜻밖이다. <고려사> ‘공양왕세가’는 “(한양에서) 호랑이가 출몰하는 등의 재해가 일어나는 바람에···”라고 밝히고 있다. 천도라는 역점 국가사업을 백지화시킬 만큼 한양에서 호환(虎患)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구 10만의 거대도시 한양에 호랑이도 우글
흔히 서울의 역사를 600년이라고 하나 서울은 사실 고려시대부터 거대도시였다. 한양에는 고려 11대 문종 21년(1067) 고려 3경 중 하나인 남경(南京)이 설치됐고, 이어 숙종 9년(1104) 남경 궁궐까지 지어졌다.

고려때 한양의 인구를 알기는 어렵지만 조선초에는 10만명 가량이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8년(세종 10) 윤 4월 8일 한성부가 한양의 인구를 왕에게 보고한다. 그수는 도성내의 경성 5부 10만3328명, 성저십리(성밖 10리) 6044명 등 총 10만9372명이다. 한양도성 둘레가 18.6㎞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 규모의 인구이다.

인구밀도가 높았던 한양은 놀랍게도 호랑이가 우글대는 맹수의 소굴이기도 했다. 인왕산은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는 속담도 있듯 호랑이 출몰이 빈번했다. 1626년(인조 4) 12월 17일자 실록은 “인왕산 성곽 밖에 호랑이가 나타나 나뭇꾼을 잡아먹었다”고 전한다. 이 호랑이는 성안으로 들어왔다가 도성을 수비하는 훈련도감과 총융청의 군사들에게 포획됐다.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범바위와 도심 전경. 성벽을 따라 오른쪽에 범바위가 보인다. 조선후기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유독 많이 살았다. -사진/배한철.
<승정원일기>에도 인왕산 호랑이가 허다하게 언급된다. “인경궁(광해군이 지었으며 서촌 대부분을 차지했던 큰 궁궐) 남쪽 성문 밖에 호랑이가 들어왔다. 호랑이는 지난달 29일과 이달 1일 밤중에 계속 돌아다니며 형조판서 이명(1570~1648)의 집에서 기르는 개를 물어갔다. 6개월 전에 (호랑이를) 포획해 근래에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도성 안에서 걱정거리가 생겼다.” -<승정원일기> 1638년(인조 16) 6월 2일자
도성, 궁궐 수시로 오가며 인명, 가축 살상
궁궐이라고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1405년(태종 5) 7월 25일 실록은 “밤에 호랑이가 경복궁에 들어와 근정전 뜰을 돌아다녔다”고 서술했다. 대궐을 범하는 것도 모자라 제 집인양 보금자리를 틀기도 했다. 1607년(선조 40) 7월 18일 실록은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그 새끼가 한 두 마리가 아니다”라고 기술한다.
국보 경복궁 근정전. 한양의 호랑이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 앞뜰도 침범해 유유히 다녔다. -사진/문화재청.
한양은 지형적으로 내사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 외사산(북한산, 관악산, 용마산, 덕양산)에 둘러싸여 있어 야생의 호랑이가 서식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산속에 낮에 숨어 살다가 밤이 되면 먹잇감을 노리고 수시로 민가에 내려와 사람과 가축을 살상했던 것이다.

한양의 호환은 조선 후기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1734년(영조 10) 9월 30일 실록은 “사나운 호랑이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140명을 물어 죽였다”고 개탄한다. 피해는 서울·경기지역이 더욱 극심해 식자들이 걱정한다고 실록은 설명을 덧붙인다.

1754년(영조 30) 윤 4월 19일 실록도 “경기지방에 호환이 심해 한달 동안 먹혀 죽은 자가 120여인이었다”고 쓰고 있다. 실록에 나열된 피해 실상은 목불인견의 지경이다. 호랑이가 어머니를 공격하는 것을 아들이 막대로 뒤쫓다가 함께 물려 죽었고, 아버지를 물고가는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기다가 아버지, 아들이 모두 희생되기도 했다. 영조는 두 아들을 효자로 정표하고 휼전(위로금)을 내렸다.

외국인들의 기록에도 맹수들이 등장한다.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가 1904년 펴낸 <상투의 사람들과 함께 한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에서 “조선에 온 뒤 서울에서만 호랑이가 적어도 한 번 이상 나타났으며 집 옆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표범을 직접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주한 미국공사이자 의사였던 H.N.알렌(1858~1932)은 호랑이 공격을 받은 환자를 직접 치료했다. 1908년 발간된 <조선견문기·Things Korea>에서 “내가 조선에서 처음 집도한 수술은 호랑이 공격을 받은 어떤 조선인의 팔을 잘라내는 절단수술이었다. 팔꿈치 바로 위에 있는 뼈가 호랑이에게 물려 썩고 있었다”고 했다. 알렌은 “그러나 상처가 잘 회복돼 그의 친구들도 의아할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숙종~정조대 호랑이 출몰 기록만 189건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각사등록> 등 문헌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숙종~정조대 도성·경기지역의 호환기록은 숙종 52건, 경종 9건, 영조 80건, 정조 48건 등 총 189건으로 나타난다. 이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같은 기간, 강원은 172건, 경상 85건, 전라 73건, 충청 61건, 평안은 56건의 피해를 입었다.
표. 숙종(1674)~정조(1800) 시기 한양·경기지역 호랑이 출몰기록. -자료/문종상. ‘17~18세기 조선정부의 포호정책 검토’. 2020.
이 시기 호환이 급증한 것은 기상이변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17세기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전대미문의 대기근이 덮치고 전염병마저 유행해 대량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생긴다. 뿐만 아니라,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우역이 야생동물에게로 퍼지면서 호랑이 먹이가 급감했다. 서식환경이 파괴되면서 호랑이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 기후변화, 서식지 파괴로 인간영역 침범
호랑이의 개체수도 늘어났다. 청나라는 1681년(강희 20)부터 1820년(가경 25)까지 전 황실과 대신들을 이끌고 하북성 위장현의 황실 사냥터에서 대규모의 가을수렵 행사를 무려 105차례나 벌였다.

청나라 4대 강희제(재위 1661∼1722)는 사냥을 통해 호랑이 135마리, 표범 25마리를 잡았고, 6대 건륭제(재위 1735~1796)는 1752년(건륭 17) 위장의 악동도천구(岳東圖泉溝)에서 호랑이를 사냥한 것을 기념해 ‘호신창기(虎神槍記)’라고 쓴 비석을 남겼다.

호랑이는 청나라의 이같은 대대적인 사냥을 피해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대거 이동했던 것이다. 1702년(숙종 28) 1702년 11월 20일 실록에서 병조판서 이유(1645~1721)도 “신이 듣건대, 청나라 사람이 늘 사냥을 일삼아 사나운 짐승이 우리 나라의 경계를 피해서 온다 합니다”라고 보고한다. 그러면서 “만약 서북 변방의 장수와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해 때때로 사냥하게 한다면 호환을 미리 제거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대책을 아뢴다.

청나라 국가적 사냥대회 피해 호랑이 한반도 대거 유입
청나라 군사의 사냥 모습을 그린 조선후기 호렵도 병풍(일부). 조선후기 호랑이가 크게 늘어난 것은 청나라가 벌인 대규모 국가 사냥행사를 피해 호랑이가 한반도로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700년대 중반, 실학자 이익(1681~1763)이 쓴 <성호사설>도 같은 얘기를 한다. “지난 해에는 또 몇 만 마리 호랑이가 서로 잇달아 강을 건너와서 온 나라에 퍼지게 되었다. 사람을 수없이 물어 죽였는데 그 화가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다. 무릇 이 미물 따위도 시대의 운수에 따라 화를 저지르는데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이 장차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조선도 초기까지만 해도 착호갑사(捉虎甲士) 설치·운영, 국가 주도의 사냥으로 포호정책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착호를 위한 군사편제가 부세와 부역의 성격으로 변질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효과는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착호군이 국가반란에 동원되면서 대규모 착호활동은 철저히 금지된다. 실제, 이귀(1557~1633)는 평산부사로 재직하면서 황해도와 경기도의 착호를 빌미로 군사를 일으켜 인조반정에 성공하기도 했다.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능침지역은 한양 호랑이의 주요 소굴이었지만, 신성한 왕릉을 훼손할 수는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이상기후, 화전 등으로 산림이 황폐화하면서 서식지를 잃은 호랑이들이 수목이 울창했던 왕릉의 금양지(禁養地·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 일종의 그린벨트)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한양 주변의 무수한 왕릉 호랑이 소굴화···규모축소와 벌목 주장 번번히 묵살
1730년(영조 6) 8월 9일자 <승정원일기>는 사복시(궁중 마필 관청)가 “살곶이 마장(왕실 목장) 안에서 연이어 호환이 있어 그동안 물어죽인 국마가 9필이나 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호랑이가 낮에는 강릉(공릉동 명종·인순왕후릉), 숭릉(구리 인창동 현종·명성왕후릉) 안의 수목이 무성한 곳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마장 안으로 넘어 들어옵니다”라고 보고했다고 적고있다.

정조 재위기에는 도성의 호환이 의소묘(懿昭廟·서대문구 북아현동 중앙여고 자리에 있던 정조의 동복형 묘), 의열묘(義烈墓·연세대 자리의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 씨 묘)로 인한 것으로 인식했다. 1779년(정조 3) 3월 24일 실록은 “두 묘소가 너무 넓고 수목이 울창해 호랑이와 표범이 백성들의 우환이 되고있다”고 지적한다.

서울 노원구 소재 강릉. 조선 13대 명종(재위 1545∼1567)과 그의 부인인 인순왕후 심 씨(1532∼1575)의 묘소이다. 뒷쪽으로 불암산이 보인다. 서울에서 가까운 왕릉은 수풀이 우거져 호랑이의 주요 서식지가 됐다. -사진/문화재청.
능원 축소, 벌목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논쟁은 가지를 조금 잘라내거나 추가적인 식목을 제한하는 미봉책으로 일관했다.

그렇다고 호환이 속출하는데 마냥 손놓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조선 조정은 사냥대회를 개최하는 대신 백성을 동원했다. 이를 위해 군·민은 물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착호장려책을 수립한다. 1699년(숙종 25) 체계적 보상규칙을 확립한 ‘착호절목’(捉虎節目)의 반포가 그것이다. 악호(惡虎) 1마리 포획 기준으로 벼슬이 없는 무과급제자는 지방의 군관에 임명하고 천민을 포함한 일반인들에게는 면포 20필을 하사하는 파격적 내용이다.

파격적 착호장려책·일제강점기 남획·한국전쟁으로 멸종
표. 1919~1924년 조선에서의 호랑이 포획수 -자료/요시다 유지로. ‘호랑이와 조선’. 1926.
일제강점기 기생까지 동원된 요란한 호랑이사냥단. 일본제국의 해운업 사업가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는 1917년 11월 12일 부산에 도착해 다음달 12월 6일 다시 부산을 출발해 일본으로 출국하기까지 함경도 일대에서 명포수들을 동원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을 벌였다. 사냥단은 ‘야마모토 정호군’으로 불렸다. 야마모토는 사냥이 끝난뒤 경성 제국호텔에서 정호군 해단식을 가지면서 각계 명사들을 초청해 호랑이 고기 시식회를 열기도 했다. -사진/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정호기. 2014.
포상 강화와 중앙군영(어영청, 훈련도감, 금위영)의 지속적 착호활동 등으로 그많던 호랑이도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어, 일제강점기 해수구제 명분으로 진행된 대규모 남획과 3년간 한반도를 초토화한 한국전쟁으로 호랑이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1921년 불국사 인근의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를 최후로 한반도 남부에서 더는 호랑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표범은 1962년 가야산 국립공원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생포돼 서울 창경원에서 사육됐다.
일본제국의 사업가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가 잡은 호랑이. 야마모토 정호군은 함흥에서 호랑이 2마리를 잡았다. 사진 중앙이 야마모토. -사진/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정호기. 2014.
한때 학계나 언론에서 한국호랑이를 찾아다녔지만 성과는 전무했다. 인적이 끊긴 심산유곡, 어딘가에서 살아있는 야생호랑이나 그자취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을 날이 올까.

#서울에서 나고 자랐더라도 100년 전의 서울로 되돌아간다면 아마 길을 잃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도시는 멈춘 듯 보여도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니까요. [서울지리지]에서는 모두가 와보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모든 과거를 들춰봅니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조선왕조 기록물

2. 심승구. ‘조선시대 사냥의 추이와 특성: 강무와 착호를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2007

3. 배성열. ‘조선후기 중앙군영의 착호활동과 의의’.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

4. 문종상. ‘17~18세기 조선정부의 포호정책 검토’. 단국대. 2020

5.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정호기: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의 한국 호랑이 사냥기’. 에이도스. 2014

6. 엔도 키미오. ‘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이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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