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울은 ‘호랑이’ 소굴…중국 때문에 확 늘었다고? [서울지리지]
귀환한 이유가 뜻밖이다. <고려사> ‘공양왕세가’는 “(한양에서) 호랑이가 출몰하는 등의 재해가 일어나는 바람에···”라고 밝히고 있다. 천도라는 역점 국가사업을 백지화시킬 만큼 한양에서 호환(虎患)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때 한양의 인구를 알기는 어렵지만 조선초에는 10만명 가량이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8년(세종 10) 윤 4월 8일 한성부가 한양의 인구를 왕에게 보고한다. 그수는 도성내의 경성 5부 10만3328명, 성저십리(성밖 10리) 6044명 등 총 10만9372명이다. 한양도성 둘레가 18.6㎞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 규모의 인구이다.
인구밀도가 높았던 한양은 놀랍게도 호랑이가 우글대는 맹수의 소굴이기도 했다. 인왕산은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는 속담도 있듯 호랑이 출몰이 빈번했다. 1626년(인조 4) 12월 17일자 실록은 “인왕산 성곽 밖에 호랑이가 나타나 나뭇꾼을 잡아먹었다”고 전한다. 이 호랑이는 성안으로 들어왔다가 도성을 수비하는 훈련도감과 총융청의 군사들에게 포획됐다.
한양의 호환은 조선 후기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1734년(영조 10) 9월 30일 실록은 “사나운 호랑이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140명을 물어 죽였다”고 개탄한다. 피해는 서울·경기지역이 더욱 극심해 식자들이 걱정한다고 실록은 설명을 덧붙인다.
1754년(영조 30) 윤 4월 19일 실록도 “경기지방에 호환이 심해 한달 동안 먹혀 죽은 자가 120여인이었다”고 쓰고 있다. 실록에 나열된 피해 실상은 목불인견의 지경이다. 호랑이가 어머니를 공격하는 것을 아들이 막대로 뒤쫓다가 함께 물려 죽었고, 아버지를 물고가는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기다가 아버지, 아들이 모두 희생되기도 했다. 영조는 두 아들을 효자로 정표하고 휼전(위로금)을 내렸다.
외국인들의 기록에도 맹수들이 등장한다.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가 1904년 펴낸 <상투의 사람들과 함께 한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에서 “조선에 온 뒤 서울에서만 호랑이가 적어도 한 번 이상 나타났으며 집 옆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표범을 직접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주한 미국공사이자 의사였던 H.N.알렌(1858~1932)은 호랑이 공격을 받은 환자를 직접 치료했다. 1908년 발간된 <조선견문기·Things Korea>에서 “내가 조선에서 처음 집도한 수술은 호랑이 공격을 받은 어떤 조선인의 팔을 잘라내는 절단수술이었다. 팔꿈치 바로 위에 있는 뼈가 호랑이에게 물려 썩고 있었다”고 했다. 알렌은 “그러나 상처가 잘 회복돼 그의 친구들도 의아할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청나라 4대 강희제(재위 1661∼1722)는 사냥을 통해 호랑이 135마리, 표범 25마리를 잡았고, 6대 건륭제(재위 1735~1796)는 1752년(건륭 17) 위장의 악동도천구(岳東圖泉溝)에서 호랑이를 사냥한 것을 기념해 ‘호신창기(虎神槍記)’라고 쓴 비석을 남겼다.
호랑이는 청나라의 이같은 대대적인 사냥을 피해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대거 이동했던 것이다. 1702년(숙종 28) 1702년 11월 20일 실록에서 병조판서 이유(1645~1721)도 “신이 듣건대, 청나라 사람이 늘 사냥을 일삼아 사나운 짐승이 우리 나라의 경계를 피해서 온다 합니다”라고 보고한다. 그러면서 “만약 서북 변방의 장수와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해 때때로 사냥하게 한다면 호환을 미리 제거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대책을 아뢴다.
조선도 초기까지만 해도 착호갑사(捉虎甲士) 설치·운영, 국가 주도의 사냥으로 포호정책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착호를 위한 군사편제가 부세와 부역의 성격으로 변질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효과는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착호군이 국가반란에 동원되면서 대규모 착호활동은 철저히 금지된다. 실제, 이귀(1557~1633)는 평산부사로 재직하면서 황해도와 경기도의 착호를 빌미로 군사를 일으켜 인조반정에 성공하기도 했다.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능침지역은 한양 호랑이의 주요 소굴이었지만, 신성한 왕릉을 훼손할 수는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이상기후, 화전 등으로 산림이 황폐화하면서 서식지를 잃은 호랑이들이 수목이 울창했던 왕릉의 금양지(禁養地·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 일종의 그린벨트)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정조 재위기에는 도성의 호환이 의소묘(懿昭廟·서대문구 북아현동 중앙여고 자리에 있던 정조의 동복형 묘), 의열묘(義烈墓·연세대 자리의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 씨 묘)로 인한 것으로 인식했다. 1779년(정조 3) 3월 24일 실록은 “두 묘소가 너무 넓고 수목이 울창해 호랑이와 표범이 백성들의 우환이 되고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호환이 속출하는데 마냥 손놓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조선 조정은 사냥대회를 개최하는 대신 백성을 동원했다. 이를 위해 군·민은 물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착호장려책을 수립한다. 1699년(숙종 25) 체계적 보상규칙을 확립한 ‘착호절목’(捉虎節目)의 반포가 그것이다. 악호(惡虎) 1마리 포획 기준으로 벼슬이 없는 무과급제자는 지방의 군관에 임명하고 천민을 포함한 일반인들에게는 면포 20필을 하사하는 파격적 내용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더라도 100년 전의 서울로 되돌아간다면 아마 길을 잃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도시는 멈춘 듯 보여도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니까요. [서울지리지]에서는 모두가 와보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모든 과거를 들춰봅니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조선왕조 기록물
2. 심승구. ‘조선시대 사냥의 추이와 특성: 강무와 착호를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2007
3. 배성열. ‘조선후기 중앙군영의 착호활동과 의의’.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
4. 문종상. ‘17~18세기 조선정부의 포호정책 검토’. 단국대. 2020
5.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정호기: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의 한국 호랑이 사냥기’. 에이도스. 2014
6. 엔도 키미오. ‘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이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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