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 아니냐고요?…돌리면 돌릴수록 더 맛있어진다니까요 [전형민의 와인프릭]
와인을 마실때면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는 동작이 있습니다. 일단 잔에 와인이 따라지면, 다들 무의식 중에 잔을 들고, 와인이 잔 벽을 따라 빙빙 휘저어지도록 돌립니다.
애호가나 경험자라면 능숙하게 잔을 돌리고, 초보라면 주변의 행동을 보고 얼른 따라하기도 합니다. 이를 스월링(Swirling)이라고 하는데요. 오늘은 와인을 마시기 전 의식 같은 행위인 스월링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스월링에 보통 정성을 기울이는 게 아닙니다. 와인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게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테이블까지 은근히 흔들립니다.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스월링하는걸까. 넌지시 물어보자, 재밌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일까요? 사정을 들어봤습니다. 평소 와인을 즐기지 않던 그는 과거 어떤 와인 모임을 가게 됐는데, 익숙하지 않은 스월링을 짐짓 자연스러운 척 하려다가, 힘조절을 못해서 주변에 와인을 흩뿌렸다는 얘기였습니다.
결국 그는 허세만 잔뜩 들어간 민폐남으로 찍혔고, 모임은 그 해프닝을 계기로 단발성으로 끝나버렸답니다. 그렇게 와인을 마시는 재미 중 하나인 스월링에 트라우마가 생긴거죠. 그런데 이 스월링, 꼭 필요한 걸까요?
이러한 상태를 ‘와인이 잠을 잔다’고 표현합니다. 표현 그대로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잠을 깨우는 과정이 필요하고, 잠에서 와인을 깨우기 위해서는 공기와의 접촉이 기본이죠. 그 공기와의 인위적인 접촉을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스월링입니다. 물론 디캔터나 에어레이터라는 기구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죠.(“2500년 역사의 디캔팅, 안하면 와인알못?”…마시기 전에 싸움날라 [와인프릭] 참고)
이제 막 와인을 알아가는 와린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와인이 미처 깨기도 전에 다 마셔버리는 겁니다. 개별 와인의 특성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올드 빈티지(생산된지 오래된) 와인일수록 잠에서 깨우는 작업에 공을 들여야 참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죠. 이와 반대로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오픈해서 바로 마셔도 향과 맛이 잘 느껴지는 와인을 ‘뽕따 와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월링의 가장 큰 목적이 공기와의 접촉을 통한 와인 깨우기에 있지만, 그 외에도 와인에 여러가지 부수적인 영향을 줍니다. 대표적인 것은 공기와의 접촉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하는 와인의 맛과 향을 좀 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잘 숙성된 좋은 와인은 매분 공기와의 접촉을 통해 맛과 향이 변화합니다. 마시는 순간마다 와인의 향기와 혀에서 느껴지는 맛의 변화를 느끼는 것은 와인을 즐기는 큰 재미 중 하나죠. 스월링은 그 변화를 좀 더 촉진하는 작용인 셈입니다.
과학적으로 일부 방향족(향기 분자)은 스월링을 통해 그 향이 더 두드러지기도 합니다. 못믿으시겠다고요? 와인을 따른 잔을 흔들지 말고 가만히 뒀다가 그대로 들어올려 향을 맡아보고, 스월링한 다음에 다시 맡아보세요. 다른 향이 느껴질 겁니다.
스월링은 와인의 향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산소 접촉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잔의 표면에 와인을 코팅시킴으로서 향을 뿜어내는 면적 자체를 늘리는 역할도 하는 겁니다. 세미나나 마스터클래스에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와인의 향을 더 잘 느끼기 위해 잔을 직접 기울여 돌리면서 잔속 와인을 잔 내부 표면에 두르는 코팅 스월링을 하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죠.
와인은 위스키 같은 고도수의 독주와 달리 점차 공기와의 접촉을 통해 맛과 향이 변해가는데요. 종래에는 맛과 향이 힘을 잃고 끝내 밍밍해지거나 시어지고 맙니다. 스월링이 와인과 공기의 접촉을 키우는 인위적인 방법인만큼 수명을 앞당기는 셈입니다. 전문가들은 스월링에 따라서도 같은 병에서 나온 와인이더라도 충분히 맛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합니다. 결국 취향의 차이라는 설명입니다.
“이것 좀 보세요. 이렇게 아름답게 흐르는 눈물을 본 적 있나요? 이건 분명 좋은 와인일거예요.”
스월링에 대해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와인의 다리(눈물) 입니다. 스월링을 하고 나면 액체가 바닥으로 다시 가라앉은 후 유리 내부에 형성되는 물방울입니다. 잔을 흔들고 나면, 유리의 내부 표면에 액체 막이 생기는데요. 이게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와인의 눈물(wine tears)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성당 아치(cathedral arches)라고 하기도 하죠.
과학자들은 이것을 ‘표면 장력의 차이로 인한 두 유체 사이의 계면을 따른 물질 전달’이라고 설명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스월링시 잔 표면에 와인의 얇은 막이 생기고, 이 막에서 알코올이 증발하면서 남은 물과 와인 혼합물이 잔의 측면에 모여서 물방울을 만들어 다시 잔으로 떨어지는 현상입니다.
병마개 잠긴 상태에 병속에 들어있는 와인은 거의 증발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스월링을 해도 이 다리가 생기지 않죠. 문제는 이 와인의 다리를 많은 사람들이 와인의 품질의 지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와인의 다리를 통해 품질의 정도를 파악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와인이 알코올, 타닌, 당분 같은 더 무거운 분자를 얼마나 많이 포함하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나마도 시음하는 곳의 온도, 습도에 따라 가변적이고요.
오늘은 와인을 즐길 때 반드시 거치는 통과의례, 스월링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별 것 아닌 요식 행위로 보였던 스월링이 알고보면 꽤 다양한 의미와 이유를 지니고 있었는데요. 앞으로는 스월링을 통해 와인의 좀 더 다양한 면모를 즐길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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