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이랑 너무 달라"…소개 잘못 했다 참변 당한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성수영 입력 2023. 12. 9. 10:22 수정 2023. 12. 9.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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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라파엘로'
16세기 거장 한스 홀바인
'난봉꾼 왕' 헨리 8세와
여섯 왕비에 얽힌 이야기
안나 폰 클레페(1539)./루브르박물관

“왕이시여, 제발 자비를!”

1540년 영국 런던탑 뒤 처형장. 처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왕에게 용서를 구하던 수석장관 토머스 크롬웰의 목이 허무하게 떨어졌습니다. ‘영국의 2인자’로 불리며 왕 바로 다음가는 권세를 누리던 크롬웰이 처형당한 이유는 딱 하나. 왕의 취향에 맞지 않는 여성을 왕비 감으로 소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장의 초상화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사달은 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중세 유럽의 왕족들은 보통 외국 왕족과 결혼하기 전 초상화를 교환해 서로의 외모를 확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선을 보거나 소개팅을 하기 전 상대방의 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했지요. 그런데 결혼 전 왕이 받아본 그림은 그의 마음에 너무나 쏙 들었습니다. 초상화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질 만큼요. 그림을 본 왕이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궁정 음악가들에게 당장 음악을 연주하라고 시켰다니 말 다 했지요.

하지만 실제로 왕비의 실물을 접한 왕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초상화와 실물이 너무 달랐거든요. 화가 잔뜩 난 왕은 신하에게 “바다 건너에서 웬 말같이 생긴 여자가 왔다”며 화를 냈습니다. “왕에게 못난 여자를 소개하다니….” 분노로 이성을 잃은 왕은 주선자인 크롬웰을 사형시켰습니다. “특별히 고통스럽게 집행하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요.

주선자가 처형당했으니 이제 초상화를 그린 화가의 차례였습니다. 오늘은 그 남자, 영국 왕실 화가를 지낸 거장 한스 홀바인과 ‘난봉꾼 왕’으로 불렸던 헨리 8세(1491~1547, 기사에서는 헨리로 지칭). 그리고 그의 여섯 아내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천재 독일인 아저씨, 왕의 화가가 되다

교사를 위한 간판(1516). 홀바인은 불과 17세때 의뢰를 받아 이 상업용 그림을 그렸다. 이 정도면 당시 지역의 최고 화가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후기 고딕 양식의 잘 그린 그림이지만, 홀바인의 나중 그림과 비교하면 수준 차이가 많이 난다. 그림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학원에 등록하세요! 부랑자, 견습 장인, 하녀, 소년, 소녀 모두 상관 없이 누구나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만일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글을 익히지 못하면, 돈을 안 내도 됩니다..." 바젤미술관

500년 전 평범한 계급 사람이 대개 그렇듯, 홀바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건 홀바인이 자신을 예술가가 아니라 기술자로 봤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예술가들처럼 ‘나는 이렇게 잘났다’ 하는 기록이나 일기장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누구랑 심하게 말다툼했다’ ‘패싸움에 휘말렸다’ 등의 공식 기록이 몇 개 남아있는 걸 보면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그가 자기 가족을 그린 작품은 일절 미화가 없어서, ‘예쁘게 좀 그려 주면 좋을 텐데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는 평생 유럽 전역을 누비며 번 돈을 가족에게 꼬박꼬박 부쳤고, 덕분에 가족들은 풍족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독일 아저씨’. 홀바인의 기록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입니다.

홀바인 가족의 초상(1528). 여성의 표정은 쓸쓸하며 눈은 충혈돼 있다. 그럼에도 그림 전체에서는 고상한 분위기가 풍긴다. 이 그림이 지나치게 우울하고 사실적이라는 이유로 "홀바인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홀바인은 평생 가족을 성실히 부양했다. /바젤미술관

홀바인은 1498년쯤 아우크스부르크(지금의 독일)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 그림으로 유명한 유명 화가. 그에게서 화가의 자질을 물려받은 홀바인은 어릴 때부터 그림 실력으로 두각을 드러냅니다. 10대의 나이로 평범한 화가들을 뛰어넘은 걸로도 모자라 시대의 한계까지 뛰어넘은, 보는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의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겁니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미술 지식과 천부적인 색채 감각 덕분이었습니다. 20대가 되기도 전에 그는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의 이름을 따 ‘독일의 라파엘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홀바인은 20대 초반인 1519년부터 서른 살 무렵까지 스위스 바젤에서 7년간 그림을 그리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홀바인의 주요 거래처는 성당이었습니다. 대표작은 ‘무덤 속의 그리스도’. 이 작품은 1521년 완성됐지만 1년 뒤 사람들의 요청을 받은 작가가 한 번 손을 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충격을 받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수백 년 뒤 도스토프예프스키도 이 그림을 본 뒤 공포에 휩싸여 몸이 돌처럼 굳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무덤 속의 그리스도(1521)의 전체 모습(위쪽)과 세부(아래쪽). 창백한 입술, 상처 주변의 녹회색 등이 섬뜩한 인상을 준다. 예수가 겪었던 고난을 평범한 사람들도 잘 이해하고, 그의 수난을 따라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로지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바젤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림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기 작품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어떤 그림은 신앙심을 잃게 한다"고 했다. /바젤미술관

보석과 무기의 도안 제작, 목판화·동판화 제작, 대형 벽화를 비롯한 종교화 제작….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지칠 줄 모르고 그림을 그리던 홀바인에게도 1528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바젤 교회에 그림이나 조각을 장식하는 게 금지되면서 일감이 뚝 떨어진 겁니다. 홀바인은 일감을 찾아 영국으로 가 정착했습니다.

탁월한 실력 덕분에 홀바인은 영국 상류 사회에서 단숨에 인기를 얻었습니다. 홀바인에게 초상화를 주문한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난생처음 보는 멋진 작품을 가져갔습니다. “독일에서 온 홀바인이라는 화가가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린다더라”는 입소문이 퍼지니 영국 왕실이 홀바인에게 주목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1530년대 초중반, 마침내 홀바인은 30대의 나이로 영국의 궁정 화가가 됩니다. 화가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습니다.

게오르그 기체의 초상(1532). /베를린 국립회화관

하지만 홀바인은 아직 몰랐습니다. 자신의 고용주가 세계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문제아라는 사실을요.

 ‘난봉꾼 왕’ 헨리

헨리 8세의 초상(1537년 이후). /국립 워커아트갤러리

여기서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가 등장합니다. 헨리는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가 역사에 끼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제압해 영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했고, 종교 개혁을 통해 성공회(영국 국교회)를 낳았습니다.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고 해외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도 주력했는데, 훗날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리며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시초가 됐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헨리는 사실 이런 업적보다도 황당한 사생활로 유명했습니다. 무려 6번이나 결혼했거든요. 그렇게 둔 6명의 아내 중 두 명은 목을 쳤고, 두 명은 이혼했으니 당시 기준으로 봐도 경악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헨리 8세의 여섯 아내들. 윗줄 ①아라곤의 캐서린(이혼) ②앤 불린(처형) ③제인 시모어(출산 후유증으로 사망) - 아랫줄 ④안나 폰 클레페(이혼) ⑤캐서린 하워드(처형) ⑥캐서린 파(헨리 8세 사후 사망). /스미소니언 매거진

이런 일을 벌인 건 헨리의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18세의 나이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는 활발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습니다. 키는 188에 체격도 좋았고 운동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여기에 머리도 좋아서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렇게 다 가졌으니 자신을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은 그렇게 형성됐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이해를 돕기 위해 헨리 아내의 순서를 번호로 매겨 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①. 헨리의 첫 번째 아내는, 원래는 죽은 형의 아내였습니다. 결혼할 때 막대한 지참금(20만두카트, 현재 가치 400억원 이상)을 들고 온 에스파냐 왕국(지금의 스페인)의 공주였지요. 하지만 원래 몸이 약하던 형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나버렸고, 지참금을 돌려주기 싫었던 헨리의 아버지는 그녀를 동생인 헨리와 결혼시켜 눌러 앉혔습니다. 헨리의 자기중심적인 성격과 바람기 때문에 좀 문제가 있긴 했지만, 연상의 아내가 잘 맞춰준 덕분에 둘은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40대에 접어든 헨리가 앤 불린이라는 여성과 뜨거운 사랑에 빠지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습니다.“나를 원한다면 왕비로 삼아 주세요.” 앤은 말했습니다. 헨리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마침 내세울 만한 명분도 있었습니다. 헨리와 첫 번째 아내 사이에는 딸 하나만 있을 뿐, 아들이 없었거든요. “우리나라를 위해서 아들이 필요해. 내가 죽고 나서 딸이 왕위를 이었다가, 외국 왕족과 결혼해서 나라를 혼수품으로 갖다 바치면 안 되잖아?” 결국 헨리는 교황에게 이혼(혼인 무효)을 승인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결정을 밀어붙이기에 왕비의 집안이 너무 강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왕비의 친정은 영국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세력이었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 합스부르크 왕가와 척지기 싫었던 교황청은 갖은 핑계를 대며 헨리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잔뜩 화난 헨리. ‘왕인 내가 내 마음대로 이혼하겠다는데, 로마에 있는 교황이 뭐라고 반대하는가?’ 마침내 초유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종교 개혁의 바람을 타고 잉글랜드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독립시켜 성공회(영국 국교회)를 만들어버린 겁니다. “잉글랜드 교회를 좌지우지할 권리는 잉글랜드 왕에게 있다! 그러니 내 이혼도 ‘셀프 승인’하겠노라.” 그리고 이 조치에 반발하는 대신들을 줄줄이 처형하고, 수도원 재산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②. 전 유럽이 경악하거나 말거나 헨리는 행복했습니다. 재혼도 하고, 귀찮은 교황과 관계도 끊고, 수도원 재산도 내 주머니에 넣고, 왕의 권한도 강화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지요. 홀바인이 영국 궁정 화가가 된 게 바로 이 무렵입니다.

 세 번의 결혼, 그리고

헨리 8세의 초상화(1537).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하지만 모든 게 헨리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앤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첫 딸이 태어난 뒤 실망한 앤에게 “곧 왕자도 태어날 것”이라며 위로를 건넸던 헨리는, 유산과 사산이 반복되자 두 번째 왕비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책임은 헨리에게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헨리가 운동 중 한쪽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허리둘레만 50인치에 달할 정도로 살이 쪘고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거든요.

그 와중에 헨리는 새로운 여성, 제인 시모어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내 애인이 되어 주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이 의외였습니다. “저는 전하의 애인이 될 수 없습니다. 결혼할 때까지 정조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를 바꿔 말하면 ‘나를 원한다면 왕비로 맞아 달라’는 것.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요. 바로 두 번째 왕비 앤이 했던 말이었습니다.

뭐든 한 번이 힘들지, 그다음은 훨씬 쉬운 법입니다. 헨리는 이혼하겠다고 나라의 종교까지 바꾼 사람. 아들도 없겠다, 고문과 협박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앤에게 간통의 누명을 씌운 뒤 처형해 버렸습니다. 첫 번째 왕비를 몰아낸 ‘비호감 악녀’였던 앤이 사형당했을 때, 그녀를 위해 슬퍼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제인 시모어의 초상(1537). /빈미술사박물관

③. 세 번째 왕비가 된 제인 시모어. 궁정 화가가 된 홀바인은 그녀의 공식 초상화를 그려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 이듬해 제인은 임신 소식을 알렸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헨리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제인은 출산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헨리는 크게 슬퍼하며 “내 진정한 아내는 제인이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림 실력이 낳은 피해자들

④. “그건 그렇고, 네 번째 신붓감 좀 찾아봐라.” 헨리가 눈물을 닦은 뒤 이렇게 말하자 신하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먼.’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요. 아내도 마음에 안 들면 처형시키는데, 신하는 오죽하겠습니까. 명분이 없는 건 또 아니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가톨릭 국가들에 둘러싸인 상황. 이럴 때 다른 개신교 국가와 동맹을 맺는다면 외교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소개팅 주선’의 임무를 맡게 된 건 당시 왕의 오른팔이자 2인자였던 토머스 크롬웰이었습니다. 크롬웰은 외교관들에게 “신붓감을 찾아오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궁정화가였던 홀바인을 데려가도록 했습니다. 초상화를 일단 그려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미 유럽에는 헨리의 악명이 자자한 상황. 이혼당하면 다행,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시집을 가겠다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내게 목이 두 개 있다면 결혼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목이 하나밖에 없군요.” “제 목이 가늘어서요.” 후보들은 이런 말을 하며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래도 시키면 해야죠. 외교관들은 발로 뛰어서 독일 명문가 출신의 안나 폰 클레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홀바인은 그녀를 정성껏 그렸습니다. 큰 키와 날씬한 몸매, 젊음과 고상함이 공존하는 분위기. 헨리는 작품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자신이 꿈에 그리던 그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안나가 궁정에 도착하자 헨리는 격노했습니다. 

다른 화가가 그린 안나의 초상. 화풍과 수준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헨리가 기겁할 만큼의 추녀는 절대 아니다. 실제로 안나의 외모는 괜찮은 수준이었다는 기록이 많다. "안나가 못생겼다"는 기록이 오직 헨리의 언급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헨리가 안나를 싫어했던 건 안나의 외모나 홀바인의 문제가 아닌, 헨리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나 기분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안나도 만만찮게 화가 났을 겁니다. 사진에 있는 헨리도 통통한 편이긴 했지만 실물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고도 비만이었으니까요. 게다가 헨리는 병을 앓고 있어 악취까지 났습니다. “전하는 냄새 나는 뚱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본인은 자신이 여전히 잘생기고 체격 좋은 미남자라고 생각했지만요. 어떻게 보면 헨리와 안나 모두 홀바인이 그린 그림의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결혼을 무를 수야 없으니 안나는 헨리의 네 번째 왕비가 됐습니다. 하지만 크게 실망한 부부는 서로를 멀리했습니다. 그러다 헨리가 안나의 시녀였던 캐서린 하워드와 사랑에 빠지면서, 불과 1년도 안 돼 짧은 결혼생활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주선자인 크롬웰은 대역죄로 처형, 안나는 이혼. 전 유럽을 황당하게 만든 결혼의 끝이었습니다.

 각자의 운명은

⑤~⑥. 47세의 나이로 32살 연하의 캐서린과 다섯 번째 결혼을 한 헨리. 하지만 캐서린은 시종과 바람을 피우다 걸리고 맙니다. 누명을 썼던 둘째 부인, 앤 때와 달리 이번에는 진짜 불륜이었습니다. 캐서린은 처형. 질리지도 않았는지 헨리는 또다시 30대의 귀족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4년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헨리가 기도서에 했던 낙서. 손가락 모양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글쓴이가 신의 벌을 받아 몸이 쇠약해졌다는 대목이다. 당시 50대였던 헨리가 자신의 업보로 천벌을 받게 될까봐 노심초사했던 기록이라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CNN

말년의 헨리는 ‘신의 벌을 받는 게 아닐까’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천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섯 번의 결혼에서 얻은 유일한 아들은 불과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왕위를 이어받은 건 첫째 부인과의 딸. 그녀 역시 아이가 없어서 그 뒤를 둘째 부인과의 딸이 물려받았고, 그녀도 평생 미혼으로 살았기 때문에 결국 왕가의 대는 끊기고 맙니다. 헨리가 가장 두려워하던 결과였습니다.

안나는 어떻게 됐을까요? 황당하게 이혼당했지만, 그 후 헨리의 비위를 잘 맞추고 현명하게 처신해서 모두에게 사랑과 존중을 받으며 잉글랜드의 대귀족 여성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됐습니다. 후대 연구자들은 그녀를 ‘헨리의 여섯 아내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잘된 일이지요.

다행히 홀바인도 끔찍한 일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왕실 화가에서 잘렸을 뿐, 목숨은 무사히 부지할 수 있었거든요. 크롬웰을 처형하고 나서 나라 꼴이 엉망이 되자 헨리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기 때문입니다. “내 가장 훌륭한 부하를 죽였다”며 후회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후 런던에서 영국 상류 사회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그럭저럭 잘 지내던 홀바인은 1543년 40대 중반의 나이로 흑사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화상(1543년경)./우피치미술관

그가 죽기 직전 완성한 이 자화상은 홀바인을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어떤 미화도 없이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보는 저 진솔한 시선은 홀바인 그림 특유의 매력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헨리와의 이런 시끄러운 사정을 알게 되면, 이 그림은 좀 달리 보입니다. 마치 홀바인이 온 유럽을 뒤집는 난리를 치는 헨리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나 참,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봤구먼.’

*이번 기사는 Anne of Cleves: Henry VIII's Discarded Bride(Elizabeth Norton 지음), 한스 홀바인(노르베르트 볼프 지음, 이영주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Hans Holbein: Portrait of an Unknown Man(Derek Wilson 지음), 명화로 읽는 영국 역사(나카노 교코 지음, 조사연 옮김, 한경arte 펴냄), Hans Holbein(Oskar Bätschmann, Pascal Griener 지음), Scholar finds doodles made by Henry VIII in ancient prayer book(CNN 기사, 2023년 6월 28일)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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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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