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네덜란드 ASML에서 마주할 광경들 [강해령의 하이엔드 테크]
정보기술(IT) 시장에 관심 많으신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음주에 한국 반도체 업계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이 있을 예정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다음주부터 네덜란드 국빈 방문 일정을 수행합니다.
대통령 일정 중 테크 기자인 제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단연 ASML 클린룸 방문입니다. 지난 7일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오는 12일(현지시간) ASML 클린룸을 직접 들어간다고 발표했죠. 대한민국 대통령이 외국 반도체 장비 회사 내부를 들어가는 건 헌정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놀랍습니다. 솔직히 저는 과장 조금 보태서 '와···진짜 네덜란드=ASML인건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놀란 마음에 준비했습니다. 제가 지난 6월 말 기사 취재 때문에 윤 대통령이 방문할 네덜란드 펠트호번 ASML 글로벌 본사를 먼저 가봤거든요. 비록 윤 대통령처럼 클린룸 내부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ASML이라는 반도체 장비 기업의 거대한 '포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현장을 돌면서 기록했던 것들을 다시 꺼내 보면서 과연 윤 대통령이 ASML에서 마주할 광경은 무엇일지, 또 이 방문이 향후 국내 반도체 기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다뤄보려고 합니다. 늘 그렇듯 분량이 깁니다. 그래도 술술 읽히시게끔 쉽게 썼습니다. 저랑 같이 펠트호벤으로 떠나보시죠.
◇네덜란드 ASML, 엄청난 외관 확장 진행 중
ASML 글로벌 본사는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자동차로 1시간 반 (127㎞ 거리) 떨어진 펠트호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박지성 선수가 활동했던 곳으로도 익숙한 ‘브레인포트’ 에인트호번에서는 차로 약 20분(7.6㎞ 거리) 떨어진 동네에 있는데요.
ASML 본사 주변은 상당히 한적한 편이었습니다. 벨트호번은 2019년 기준 인구 4만5000명의 작은 마을이거든요. 그런데 ASML 글로벌 본사 내부로 들어갈수록 소음이 정말 커졌습니다. 이곳은 '무한 확장'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이 증설과 공사 중이었거든요.
그 중에서도 제 눈에 가장 띄었던 풍경과 소음은요. 본사 외곽 쪽에서 일어나는 너무나도 활발한 설비 증설 현장이었습니다. 우선 뼈대를 갖춘 신규 공장인 '5KM'이라는 공장이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ASML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5KM은 노광기 테스트 설비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다 생산한 노광기나 핵심 부품이 잘 작동되는지 시험해보는 공간으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객사 출입도 있을 수도 있고요.
구체적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거대한 규모를 묘사해 드리자면요. 저의 방문 당시 3개의 초대형 타워 크레인이 증축에 필요한 원자재를 나르고 있었고요. 흰색 철골 구조 안에서는 수십 명 인부들이 사다리차를 타고 공중에서 상태를 점검하고, 굴삭기들이 바닥을 정리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5KM 건설 현장 바로 옆에 있는 공터가 저를 가장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아직 골조 하나 없고 땅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형 건설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초대형 '항타기' 대여섯대와 각종 중장비들이 분주하게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ASML이 진행하는 공사 현장은 맞느냐고요?
네, 맞습니다. ASML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곳은 플랜 자위트(Plan Zuid)라는 이름의 땅인데요. Zuid는 네덜란드어로 '남쪽'인데, '남쪽 개발 계획'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잘 알겠지만 이곳은 ASML의 새로운 노광기가 만들어질 공간입니다. 현재 ASML은 EUV 노광기를 연간 40대 내외로 만듭니다. 하지만 2026년까지 EUV 노광기 지금의 2배 이상인 90대, 2028년에는 이따 조금 더 설명드릴 하이(High)-NA 노광기를 20대 이상 생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 신규 클린룸에서 이 물량 일부를 소화할 공산이 상당히 큽니다. ASML은 자사 홈페이지에 이 지역에 대해 "고객이 최첨단 칩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ASML 최신 기기를 생산할 '클린룸'이 여기 구축될 것이 분명하다"며 "확장구역에는 사무동은 건설되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언급했죠. 취재 당시에는 공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ASML은 플랜 자위트 뿐만 아니라 ASML 본사 북쪽에 있는 플랜 노르트(Noord)도 확장 계획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ASML의 확장은 본사 주변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본사에서 택시를 타고 에인트호벤 쪽으로 가는 길로 5분 정도 이동해봤더니요. De Run 1000이라는 구역에 4개의 사무동이 새롭게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곳 역시 4개 사무동에서 더 뻗어나갈 계획으로 보입니다. ASML은 연초 올해 24억유로(약 3조4000억원)을 설비 투자에 쓰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물론 여기엔 한국, 대만 등 현지화 기지 건설 비용도 포함돼 있겠지만 ASML의 심장은 뭐니뭐니해도 이곳 펠트호번이구나 싶었습니다. 윤 대통령과 이재용 회장 일정 안에 ASML 본사의 외관 시찰까지 포함돼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회사가 정말 네덜란드 하이엔드 테크의 자존심으로서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단적인 장면들로는 충분해 보입니다.
◇윤 대통령이 직접 들어갈 클린룸의 모습은 어떨까
그럼 윤 대통령과 이 회장은 ASML의 어떤 클린룸을 들어갈까. 일반적인 ASML의 EUV 노광기 제조 설비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만약 ASML이 열심히 구축 중인 ASML 하이(High)-NA 랩을 시찰한다면 상당히 의미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ASML이라는 회사가 왜 우리나라 대통령까지 직접 본사를 방문하는 곳이 됐는지 잠깐 설명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ASML은 반도체 장비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특히 동그란 웨이퍼 위에 복잡한 반도체 회로를 빛으로 반복적으로 찍어내는 '노광기'를 생산하는데요. 여기서 쓰이는 빛의 파장이 범용으로 쓰였던 불화아르곤(ArF)이라는 광원(光原)보다 무려 14분의 1이나 짧은 EUV로 반도체 회로를 찍는 EUV 노광 기기를 세계에서 단독으로 만듭니다. 가격은 2000억 원을 호가하고요.
그런데 이 독자 EUV 노광 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도 그 회사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텔, TSMC 등 반도체 업계를 주름잡는 초강력 칩 제조사들입니다. 첨단 칩 수요는 갈수록 늘어나고 각 나라의 칩 패권 경쟁이 너무나도 치열해지는 만큼 ASML EUV 노광기의 인기가 더욱 늘어납니다. 기업의 오너와 CEO 뿐만 아니라 각 나라 행정부 수반까지 국가별 EUV 노광기 쟁탈전에 참여하는 추세죠. ASML의 영향력과 매출이 그렇게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 요즘 이런 ASML과 노광 분야 전문가들이 요즘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하이-NA입니다. 이 하이-NA는요. 차세대 EUV 모델입니다. 하이-NA를 다른 용어로 바꿔보면 0.55NA입니다. 이게 무엇이냐면요. EUV 빛을 웨이퍼로 최종 전달하는 EUV 노광기 속 렌즈의 크기가 기존 EUV 노광기에서 쓰인 0.33NA보다 1.67배 커진다는 얘깁니다. 0.33NA보다 개구수(numerical aperture), 한마디로 렌즈 크기가 크다고 해서 High-NA라는 말이 쓰입니다. 정말 간략하게는 EUV 빛을 더 큰 면적의 렌즈에 더 많이 받아서 웨이퍼에다가 모아주니까, 찍히는 회로가 더 선명하고 균일하게 찍힌다는 거죠.
EUV 노광과 렌즈 기술은 난도 자체가 상당히 높습니다. 렌즈 크기를 키우면서 빛의 성질과 해상력을 맞추는 작업은 너무나도 정교해야하고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 렌즈 면적이 커진다면 말이죠. EUV 빛을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반사경 등 EUV 노광기에 들어가는 무수한 부품들의 크기도 같이 커집니다. 그래서 장비의 가격이 기존 EUV 노광기 가격보다 2배가량 더 높은 3억 유로(약 4000억원)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4000억 원은 장비 한 대당 가격입니다.
ASML은 이 하이-NA 기기 대량 양산을 2026년 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미 양산은 시작됐습니다. 하이-NA 장비 1호기의 주인공은 인텔이죠. 인텔은 이 기기로 1.8나노(18A) 반도체를 2025년부터 생산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ASML 본사 주변에선 양산과 함께 재밌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ASML은 벨기에 최대 반도체연구소 imec과 함께 '하이-NA 랩(lab)'을 갖추고 있습니다. 고객사들이 하이-NA 기기를 자기 회사에 들이기 전, 이곳에 설치된 노광기로 다양한 성능 테스트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는데요. ASML의 하이-NA 랩에 대한 자료를 보면요. 하이-NA 노광기 1세대 장비 'EXE:5000'가 이 랩에 설치되고, 내년 1분기에 연구소 가동을 시작한다고 밝혔죠. 윤 대통령과 이 회장이 가동 전 이곳을 들른다면 차세대 EUV 기기인 하이-NA 노광기 수급을 위한 적어도 한국-삼성전자-네덜란드-ASML 간 공고한 협력 체계가 갖춰졌다는 메시지를 글로벌 시장에 던질 수 있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첫번째 양산용 EXE:5000는 인텔이 차지하게 됐고, 두 번째 기기는 벨기에 imec 연구소에 갖춰질 예정입니다. 업계에 따르면 1세대 하이-NA 모델 EXE:5000의 생산 대수는 10대 미만입니다. 이 1세대 장비를 받을 기업 안에 SK하이닉스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지만, 파운드리 시장 지위 확보에 도전하는 삼성전자는 당연히 포함돼 있을텐데요. 물론 앞으로 시황과 삼성전자·ASML의 전략에 따라 하이-NA 수급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협력에 대한 의지와 기술적 자신감을 대외적으로 알리며 공급이 수월해졌단 걸 보여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번 국빈 방문에서 이런 그림이 보여진다면, 앞으로 한국 대형 반도체 회사와 ASML 간 하이-NA 시장에서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보는 것도 반도체 업계의 큰 이슈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네덜란드에서 ASML 방문 외에도 가져와야 할 것
대통령이 방문할 ASML 외에도 네덜란드에는 또다른 중요한 반도체 포인트 두가지 있습니다.
우선 네덜란드는 '장비 강국'입니다. 보통 반도체 장비 강자는 ASML과 함께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KLA 등 미국 회사들을 떠올리지만 숨은 고수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두 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는 ASM이라는 회사인데요. 증착, 특히 원자 알갱이로 미세한 층을 웨이퍼 위에 쌓는 원자층증착(ALD) 분야에서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는 회사죠. 세계 장비 매출 톱 10안에 듭니다. ASM은 거대한 다국적 회사이기도 합니다. 본사는 네덜란드에 있지만 한국, 미국, 일본에 R&D 설비가 있고 생산시설 또한 한국과 싱가포르에 분산돼 있습니다.
또다른 하나는 베시라는 회사입니다. 최근 상당히 뜨고 있는 회사인데요. 서로 다른 두 개의 칩을 이어붙이는 패키징(칩 어태치) 분야에서 유명합니다. 특히 저의 연재물에서도 여러번 다뤘던 '하이브리드 본딩' 최강자입니다. 이 회사도 다국적 기업입니다.
주요 설비는 스위스에 있고, 싱가포르에도 전진 배치된 설비가 있지만 회사 웹사이트에 따르면 여전히 본사 기능을 하는 4개 건물 중 3군데는 네덜란드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ASML 외에도 이렇게 세계 반도체 장비 업계를 뒤흔드는 장비 강자들이 네덜란드 생태계에서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고급 공학 인재를 키워내서 기술을 이어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교훈도 정부에서 함께 가져온다면 국빈 방문이 한층 더 의미가 있어질 듯 합니다.
또 한가지 포인트는 ASML 중심으로 갖춰진 반도체 소재·부품 생태계입니다. 물론 EUV 노광기 핵심 기술 파트너로 독일의 레이저 업체 트럼프와 렌즈 회사 자이스, 미국의 사이머 등이 자주 언급되지만요.
ASML의 전체 공급 업체 5000개 중 네덜란드 업체는 32% 수준인 1600개나 되고, ASML 전체 제조 비용 중 39%가 네덜란드에서 발생된다고 합니다. 단일 국가 기준 미국, 일본 등을 앞지르고 최대입니다. 웨이퍼 핸들링 로봇 VDL, 기전공학(mechatronics) 기업 NTS 등 아주 탄탄한 자국 부품 기업들이 ASML의 기반을 탄탄하게 받치고 있단 얘기입니다. 과거 최고의 공학 기술이 융합된 '풍차'를 잘 만든 사람들의 후예들 답게 기초 기술 기반이 탄탄합니다. 정부에서는 이번 국빈 방문에서 ASML과의 협력 강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소재·부품 등 반도체 요소 기술 기반이 상당히 취약한 우리나라 생태계를 위한 고민과 해결책도 함께 담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운 겨울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강해령 기자 hr@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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