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주나물 팔아 부자된 유학생…고국서 전재산 기부한 까닭 [추동훈의 흥부전]
성공한 기업인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사람들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악착같이 노력해 이뤄낸 자수성가형, 태어나보니 재벌인 대물림형, 실력보단 시대와 운을 타고난 운칠기삼형. 그리고 드물게 귀감을 불러일으키는 선행활동과 기부·재산 환원으로 대표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형. 사실 미국에선 마지막 이미지로 대표되는 기업인들이 여럿 있습니다.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 등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일구어낸 자산의 상당 부분을 자녀들에게 상속하는 대신 재단을 만들어 기부하거나 사회 공헌 활동으로 내놓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죠.
이러한 미국에서도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액 기부한 기업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은데요. 2020년, 80억달러(한화 10조5000억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기부한 미국의 기업인이 화제를 모은바 있습니다.
공항 면세점 기업 ‘DFS’를 창업해 큰 돈을 번 척 피니가 그 주인공. 그는 평생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공언했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기부문화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전재산을 내놓은 기업인은 척 피니가 전무후무합니다. 실제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평소에도 척 피니로부터 귀감을 얻어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쳤다고 밝힌 바 있죠. 버핏은 “척 피니는 우리 모두의 표상이며 그가 평생에 이룬 업적은 위대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사실 흥부전에선 국내 기업이나 브랜드를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광고 논란이나 찬반 양론이 항상 뜨겁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제약업계 매출 1위 기업인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의 이야기는 비판을 감수하고 준비해봤습니다.
유일한의 형제들도 러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유학했습니다. 유일한은 선교사의 고향인 네브래스카 주에 정착합니다. 독신자였던 태프트 자매에 입양된 유일한은 커니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신문 배달을 하며 용돈을 벌고 인종차별을 버텨내며 서서히 뿌리를 내려갔습니다. 유일한은 14살이 되던 1909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하며 “유능한 사람이 최대의 자본이다”란 신념을 키워나갔습니다.
유일형이던 이름은 신문을 배달하던 중학교 시절 우연한 기회에 바꾸게 됩니다. 당시 친구나 주변 미국인들이 발음이 어렵던 ‘일형’을 ‘일한’ 정도로 제멋대로 불렀습니다. 여러 번 지적해 고쳐줬지만 도무지 잘되지 않자 차라리 이름을 바꾸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 것인데요.
특히 한국을 뜻하는 한(韓)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하니 제법 쓸만한 이름이 된 것입니다. 유일한은 곧바로 평양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승낙을 구했고 아버지는 승낙 뿐 아니라 아예 집안의 돌림자를 ‘한’자로 바꾸어 이때 이후 태어난 동생들에게 적용해버립니다. 참으로 그 아들에 그 아버지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선 자본의 힘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은 유일한은 청년 사업가로서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숙주나물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후 만두 등 여러 중국 요리에 두루 쓰이는 숙주나물을 유리병에 담아 미국에 거주 중인 중국인과 중국계 미국인들에게 판매했습니다.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되어가던 1921년, 교통사고가 발생합니다. 바로 유일한이 운전하던 배달 트럭이 디트로이트 시내 한복판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난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졸음운전을 한 탓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요. 진실은 유일한만이 알 것 같습니다. 유한양행은 이를 유일한 박사의 ‘바이럴 마케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미국에서 큰 돈을 번 유일한은 미국에서의 정착 대신 이듬해인 1926년 한국으로 향합니다. 그의 부친은 조국의 미래를 위해 유학을 보낸 아들이 숙주나물을 파는 장사치로 살아가는 모습에 크게 실망했고 크게 꾸짖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26년 유한양행을 창업합니다.
그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택하며 1930년 라초이의 지분을 전부 매각해버립니다. 그리고 라초이는 지금도 미국에서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기도 합니다.
이후 유한양행은 1933년 직접 개발해 판매한 베스트셀러 안티푸라민을 내놓으며 국내에서의 인지도도 쌓아갔습니다. 호미리 여사는 소아과 병원을 직접 개업해 소아들을 치료했습니다. 유일한 박사는 윤리 경영을 실천했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해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독립 후 유한양행은 모범적인 경영과 납세 등으로 항상 이름이 오르내리며 정도경영을 이어갑니다. 1969년 유일한은 노환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납니다. 그는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대신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인계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전문경영인 제도 도입으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1971년 기준 그가 기부한 재산은 407억원에 달했습니다.
오는 12월 10일은 유한양행이 설립된 날입니다. 1926년 일제 치하의 어둠속에서 한국말을 잊을 정도로 오랜 기간 미국에 머물렀던 유일한 박사의 귀국이 일으킨 나비효과는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단순히 한국인의 삶 뿐만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과 같은 유일한 박사의 삶은 척 피니 못지 않은 한국의 자랑으로 오랜 시간 기억될 것입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김하성, 술만 먹으면 때렸다”…신상 밝히고 언론에 나선 임혜동 - 매일경제
- 부부 1000쌍, 통장에 月 300만원 이상 들어온다…이게 뭔가 봤더니 - 매일경제
- “하루 1000만원 줄게 마트에서만 살아”…쉬운 도전인 줄 알았는데 - 매일경제
- 부산서 네덜란드로 떠난 尹과 JY 보며 일본이 칼 가는 이유 [위클리반도체] - 매일경제
- “한화? 중국 화웨이 오타 아냐?”…‘의문의 1패’ 뒤집고 수출 대박 - 매일경제
- “미치도록 아름답다”…세상 모든 남자들을 사로잡을 의외의 중국女 - 매일경제
- “형은 좀 쉬고 있어, 내가 뛸게”…비트코인 잠잠하니 ‘이 코인’ 펄쩍 - 매일경제
- “궁금해서 사봤는데 가성비 대박”…없어서 못판다는 이 라면과 위스키 - 매일경제
- “아들 사준 자전거가 왜 당근에”…분노한 아버지 선넘은 중학생 고소 - 매일경제
- ‘韓 피겨의 희망’ 신지아, 김연아 이후 18년 만에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두 대회 연속 입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