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실업,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프랑스 실험은 현재진행형
⑮ 장기실업 제로 실험: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
편집자주
인류와 지구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유럽의 마을과 도시를 탐험하는 기획을 신은별 베를린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2016년 프랑스 북동부 도시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에 거주하던 조나토(22)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취직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인구 1만1,000여 명의 소도시에서 일자리 찾기란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젊으니 파리 같은 대도시로 가서 일을 구하라"고 권했으나, 그에겐 쉽지 않았다. 인파가 많은 곳에 가면 불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향에 살고 싶었다. 실업 기간이 12개월을 넘기자 '장기실업자' 딱지가 붙었다.
이듬해 희망이 찾아왔다. 도시 안에 '라 파브리크'라는 중소기업이 들어서며 일자리 48개가 한꺼번에 생겼고, 조나토도 채용됐다. 중고물품 수거 및 재판매, 친환경 농산물 생산 등을 하는 기업이었다. 라 파브리크가 공공장소 청소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히고, 이후 양모를 활용해 침구류를 제작하는 기업인 '드 렌드 앙 레브'까지 들어서면서 조나토처럼 취업에 성공한 장기실업자는 80명으로 늘어났다(2023년 9월 기준).
작은 도시에 기업이 연달아 들어선 것만큼이나 놀라운 건 제1의 목표가 '역내 장기실업자를 0명으로 낮추는' 것이라는 점이다. '수익 창출'보다 '고용'을 우선하는 기업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한국일보는 10월 25일 현지를 찾아 기업 설립 배경과 운영 원리를 살펴봤다.
'장기실업률 제로는 가능할까?' 실험 나선 프랑스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는 인구 밀도가 1km²당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지방 소도시다. 마땅한 기반시설이 없어 기업도 선뜻 투자하지 않는다. 이런 곳에 라 파브리크, 드 렌드 앙 레브가 설립된 건 국가 차원의 결단과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랑스 헌법 전문엔 이런 문구가 있다. "모든 사람은 노동의 의무와 취업의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현실은 헌법과 다르다. 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6년 노동 의사와 능력이 있음에도 1년 넘게 일자리를 찾지 못한 장기실업자는 94만 명이었다. 경제활동인구의 4.6%였다.
"헌법에 버젓이 적힌 권리를 모른 척하는 건 국가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방기하는 게 아닐까?" 프랑스 정부와 의회에선 이 같은 질문과 반성이 나왔고, 이는 '개개인의 능력과 상황에 맞는 일자리를 만들어 보자'는 논의로 이어졌다. 같은 해 의회는 '장기실업자가 제로인 영토(Territoire zéro chômeur longue durée’·TZCLD)'를 만들자는 내용의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물론 프랑스 정치권이 자발적으로 장기실업에 주목했다기보다는, 빈곤 관련 시민단체 'ATD 카르 몽드'의 끈질긴 설득이 그 배경에 있었다.
TZCLD 프로젝트 작동 방식은 이렇다. ①전국 10개 지역에서 2016~2021년 한시적으로 운영한다. 일종의 '실험'이다. ②이들 지역에는 장기실업자 파악·관리 등을 전담하는 '지역고용위원회'가 설치된다. 지역고용위는 지역에 어떤 기업을 만들고, 몇 명을 고용할지 등도 결정한다. ③지역고용위 연구·조사를 토대로 장기실업자 고용을 목표로 하는 '고용지향기업'이 설립된다. 이 기업은 역내 기존 일자리를 잠식하면 안 된다. ④고용지향기업에 고용된 노동자 임금은 국가·지방자치단체 예산으로 부담한다. 장기실업자의 취업으로 굳는 실업수당 예산이 전용돼 투입된다.
TZCLD 프로젝트 전체를 총괄하는 TZCLD협회 소속 빅토리아 바주르토 보테로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핵심은 '직장에 노동자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에 맞춰 직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육 때문에 일주일에 20시간만 일할 수 있는 실업자에게 법정 근로시간 35시간을 채우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20시간만 근무해도 되게끔 일을 조정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장기실업, 개인 잘못 아닌 국가 책임" 발상의 전환
작은 지방자치단체 39개를 아우르는 지역인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는 TZCLD 프로젝트 실험을 위해 선정된 10곳 중 하나였다. 당시 이곳엔 약 500명의 장기실업자가 있었다.
국가 차원의 결정이었지만 사업 성공을 위해선 지역고용위 역할이 중요했다. 우선 '장기실업자 발생 원인'부터 파악에 나섰다. 지역고용위 위원장인 필립 파르멍티에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 의장은 "장애 판정을 받지 않아 장애인 고용 혜택은 받지 못하는데, 배려를 받지 않으면 일상적 업무를 소화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유독 많았다"고 회상했다. '가족 돌봄 때문에 하루 7시간씩 일할 수 없다' '대중교통이 없는 도시라 직장에 가려면 자동차가 필요한데 운전을 못한다' 등의 이유도 있었다.
지역고용위는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에서 활용 가능한 자원은 무엇인지,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서비스가 있는지 등도 조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설립된 기업이 라 파브리크와 드 렌드 앙 레브다.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 소속 공무원 장 마크 크리스토퍼는 "드 렌드 앙 레브의 경우, 주민 13명이 양을 키우는데 양모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해 만든 기업"이라고 말했다.
고용지향기업은 구직자가 직장을 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데 주력했다. 라 파브리크 매니저 코린은 "일반 기업에선 사측이 정한 규칙을 노동자가 따르도록 감시하고, 위반 시 제재를 가하는 게 관리직의 주요 업무 중 하나지만, 여기에선 노동자 개개인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그에 맞춰서 업무를 배분하는 게 주된 업무"라고 설명했다. 라 파브리크는 '자가용이 없어 출근하기가 어렵다'는 장기실업자 고충 해결을 위해 출퇴근용 셔틀 차량도 마련했다.
근무 태만 등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직원을 해고하지도 않는다. 기업 수익 규모와 고용은 별개다. 라 파브리크 영업 직원으로 벌써 6년째 근무 중인 조나토는 "고용 불안이 해소되니 '내 일이니 더 열심히 하자'는 책임감이 더 많이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감 회복" 노동자 웃었지만… '지속가능성' 고민도
라 파브리크와 드 렌드 앙 레브엔 모두 80명이 고용돼 있다. 이곳에서 경력을 쌓은 뒤 이직한 이들을 비롯, 지역고용위의 지원·관리를 거친 누적 인원은 369명에 달한다. 지역고용위에서 장기실업자 개별 관리를 담당하는 샤를린 글로델은 "장기실업자 인터뷰 과정에서 이들의 능력·상황·요구를 파악하고 다른 일자리로 연계해 취업을 성사시킨 사례도 상당하다"고 밝혔다.
일자리 창출에 따른 부수적 효과도 많다.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 부의장인 알랭 그리는 "각종 문화공간, 복지시설은 대도시에 집중되기 때문에 소도시에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단도 잃게 된다. 소도시 주민들에게 일자리는 복지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의장 드니 토마셍은 장기실업을 개인 잘못으로 치부하는 오해에서 벗어난 게 최대 성과라고 했다."사업 진행 전까지는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데 오랫동안 일을 안 하는 사람'을 보면 '게을러서 쉬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장기실업자 면면을 들여다보며 개인의 게으름·일탈이 원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게 된 겁니다. 이런 오해가 풀리면서 장기실업자들도 자신감을 회복하고 도시에도 활력이 돌게 된 것 같아요."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 등 TZLCD 프로젝트에 참여한 10개 지역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며, 사업 기간은 2026년까지로 5년 더 늘었다. 대상 지역도 기존 10곳에서 약 60곳으로 늘어났다. 보테로는 "1차 프로젝트 때 1,000명 정도가 고용됐고 지금은 2,335명이 고용된 상태"(10월 27일)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모델을 배우기 위해 벨기에, 이탈리아, 핀란드 등의 지자체도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초반 5년간 사업 기틀을 마련했다면, 연장된 사업 기간 동안엔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하는 게 라 파브리크 등 고용지향기업의 과제다.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사업 자체가 좌초될 위험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 파브리크가 당초 재활용품 판매 경로를 자체 소매점으로만 뒀다가 최근 마을 장터로 확장하고, 벌꿀로만 한정했던 식품군을 건조 과일, 요플레 등으로 확대한 이유다.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에서 만난 많은 이들은 '장기실업률을 0으로 만들겠다'는 실험이 성공으로 끝날지, 실패로 끝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가 자신들의 실험을 한번쯤 들여다봐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파르멍티에 의장은 한국일보에 이렇게 말했다. "장기실업은 일자리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도, 돈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도 아닙니다. 국가가 개인의 능력과 상황을 살피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결 가능한 문제죠."
※유럽의 마을과 도시를 탐험해 온 별의별 유럽은 이번 15회를 끝으로, 새롭게 탈바꿈합니다. 내년 1월 6일부터는 우리가 알아야 할, 알아두면 도움이 될, 알수록 재미있는 유럽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별의별 유럽 시즌2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페이 드 콜롱비 쉬드 툴루아(프랑스)= 신은별 특파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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