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과 이름이 비슷하니 알아서 제 이름을 바꾸겠나이다”

박종인 기자 2023. 12.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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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1884년 갑신정변 한 달 뒤, 改名 봇물 터졌던 까닭은

지난 4일은 ‘갑신정변’ 139주년이었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 서울 북촌에서 살던 명문가 출신 젊은 벼슬아치 5명이 청나라에서 독립하고 부패한 민씨 정권을 타도할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모든 실패한 혁명은 역모가 되고 그 주동자는 역적이 된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거리에서 살해되거나 망명했다. 가족도 자살하거나 처형됐다.

그런데 한 달이 채 안 된 그해 음력 11월 7일부터 ‘승정원일기’에는 자기 이름을 바꾸겠다는 벼슬아치들 개명(改名) 신청이 터진 봇물처럼 기록돼 있다. 개명 담당 부서인 예문관은 왕명으로 이들을 남김없이 허가했다. 1884년 음력 12월 말까지 정부에 개명 신청을 한 사람은 60명이다. 해를 넘기고도 개명 신청은 끝없이 이어졌다. 공인된 신분 세탁, ‘역적 이름 개명 사태’다.

지금도 이름을 바꾸려면 법원에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은 왕의 허가가 떨어져야 개명이 가능했다. 이유는 ‘범죄인 혹은 긴절하지 않은 사유로 가볍게 개명하는 자가 많아서’였다.(1449년 음 3월 19일 ‘세종실록’) ‘신분 세탁’을 방지하려는 조치다.

그런데 국왕이 개명을 무더기로 허락한 사건이 몇 있다. 역모(逆謀) 사건들이다. 역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알아서’ 국가에 개명 신청을 했고, 국가는 이런 신청을 받아줬다. 갑신정변이 대표적이다.

갑신정변(1884) 주역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김옥균(왼쪽부터).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들을 포함한 참가자들은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정변 직후부터 이들 주도 세력과 이름이 한 글자라도 비슷한 사람들로부터 이름을 바꾸겠다는 개명 신청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위키피디아

1884년 개명 사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 정변 주역 5인 외에 갑신정변에 참여해 재판을 받은 사람은 23명이다. 이 가운데 21명이 능지처사(토막 처형)와 참수형을 당했다. 이들 이름은 이희정, 김봉균, 신중모, 이창규, 이윤상, 오창모, 서재창, 차홍식, 남흥철, 고흥종, 이점돌, 최영식, 윤경순, 이응호, 전흥룡, 윤계완, 김창기, 민창수, 최성욱, 이상록, 신흥모, 낭창관, 신기선이다.(박은숙 역 ‘갑신정변 관련자 심문, 진술 기록’ 아세아문화사, 2009)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모반대역부도(반역역모)’와 ‘모반부도(반역)’ ‘지정불고(범죄 미신고)’였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인 1884년 음력 11월 7일, 첫 개명 신청이 접수됐다. 한성 하급 관리 서광두(徐光斗)가 병두(丙斗)로, 병조 인사 담당인 정랑 서재후(徐載厚)가 정후(廷厚)로, 세조릉인 광릉 담당 관리 서재완(徐載琬)이 정완(廷琬)으로 개명을 신청했고, 정부는 이를 허가했다. 정변 후 망명한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을 의식한 개명 신청이었다(1884년 음11월 7일 ‘승정원일기’). 같은 날에는 사복시 하급 관리 김영식(金英植)이 형식(亨植)으로 개명을 허가받았다. 정변을 주도한 홍영식(洪英植)과 이름이 같았다.

12일에도 서광범과 같은 ‘광(光)’ 자 항렬 관리 4명이 개명을 허가받았다. 19일에는 김옥균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관리들이 일제히 개명을 신청했다. 인조 아버지 능인 장릉 참봉 김문균(金文均)은 문규(文圭)로, 김흥균(金興均)은 흥규(興圭)로, 김승균(金昇均)은 승규(昇圭), 김정균(金貞均)은 정규(貞圭), 김용균(金用均)은 용규(用圭), 김호균(金澔均)은 철규(澈圭), 김계균(金桂均)과 김가균(金可均)은 각각 태규(泰圭)와 석규(錫圭)로 개명했다.

서재필과 한 글자가 겹치는 서재두(徐載斗)는 정두(廷斗)로, 박영효와 이름이 겹친 박영풍(朴泳豐)은 승현(勝鉉)으로 바꿨다. 이희정(李喜貞)과 한 글자 ‘발음’이 같은 이호정(李鎬鼎)은 호겸(鎬謙)으로 바꿨다.

성이 달라도 이름에 한 글자라도 이 역적들과 같은 한자가 있으면 어김없이 바꿨다. 서재필과 이름이 같은 김재필(金在弼)은 재원(在䛃)으로 개명했고 오창모(吳昌模)와 같은 김창모(金昌模)는 흥모(興模)로 개명했다. 박영효와 한 글자가 같은 방효함(方孝涵)은 두형(斗衡)으로 바꿨다. 이희정과 이름이 같은 차희정(車喜貞)은 우정(禹鼎)으로 바꿨다.

정변 타도 대상, 事大의 개명

거리에서 참수되고 토막 살해 당하는 역적들을 목격했으니, 중·하급 관리들은 행여 튈 불똥을 회피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역적 낙인을 무릅쓰고 정변을 일으킨 이유도 개명과 관계가 깊다.

1866년 음력 9월 15일이다. 프랑스 극동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한창인 때였다. 청나라 칙사가 압록강을 넘어 한성으로 오던 중이었다. 이들을 맞는 ‘영접도감’이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칙사 경로에 있는 고을과 관아 이름 가운데 경기도 홍제참(弘濟站)은 홍제참(洪濟站), 삭녕(朔寧)은 삭안(朔安)으로, 황해도 재령(載寧)은 안릉(安陵), 평안도 영변(寧邊)은 연변(延邊), 영원(寧遠)은 영원(永遠)으로, 구영진(仇寧鎭)은 구영진(仇永鎭), 숙영관(肅寧館)은 숙영관(肅永館)으로 개명했나이다.”(1866년 음 9월 15일 ‘승정원일기’)

영접도감이 개명했다는 ‘홍(弘)’과 ‘녕(寧)’과 ‘재(載)’는 각각 청나라 황제 건륭제(弘曆), 도광제(旻寧)와 동치제(載淳) 이름에 들어 있는 한자다. 감히 임명장을 내린 황실 이름을 조선에서? 아니 될 말씀이었다. 영접도감이 이리 덧붙였다. “사신들 이름 가운데 피해야 할 글자가 있으면 이 또한 바꾸라고 했나이다.”

이 칙사들은 동치제가 고종에게 보내는 ‘고명(誥命)’을 들고 오는 사신단이었다. 청나라 황제 동치제가 고종을 조선 국왕에 책봉한다는 임명장이다. 고종은 9월 24일 무악재에 있는 모화관에서 황제를 대리한 이들에게 임명장을 받았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이었다. 그 사대에 반발해 갑신정변이 터졌고, 모두 개명당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척결 대상 1호였던 민영준도 이 개명 행진곡에 한몫했다. 1901년 평리원 재판장 김영준이 부패 및 역모 혐의로 교수형을 당했다. 민영준은 민영휘로 개명했다.(국사편찬위, ‘국역 매천야록’ 3 1901년 8. 주석면이 본관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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