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엔 네가 필요해…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아

박경은 기자 2023. 12. 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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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케이크 홀릭 중...

크리스마스 모임에 빼놓을 수 없는 케이크.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하는 파티나 선물용 케이크를 고민한다면 이번엔 뭘로 정해볼까. 색다르고 ‘힙’한 느낌을 주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올해는 파네토네를 골라보는 것도 좋은 선택일 수 있겠다. 파네토네는 이탈리아 밀라노가 고향인 크리스마스 빵이다. 밀라노를 대표하는 파네토네 맛집 양대산맥으로 코바와 마르케시가 있다. 각각의 소유자는 루이뷔통과 프라다. 밀라노 사람들의 자존심이라고도 불리는 이 빵은 공정이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국내에는 호텔가를 중심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지만 올해는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참이다. 유행에 민감한 서울 강남이나 성수 등지의 디저트 매장이나 제과점, ‘전국구 빵지’로 꼽히는 유명 제과점들도 파네토네를 선보일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부상한 독일의 크리스마스빵 슈톨렌의 인기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흥미로운 포인트다.

나폴레옹 과자점에 진열되어 있는 파네토네

그래도 전통적인 ‘케이크’의 아성은 공고하다. 지난달 중순부터 호텔, 시중 제과점, 베이커리 카페 등은 앞다퉈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케이크를 내놓으며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매년 나오는 케이크. 하지만 높아지는 소비자들의 눈높이를 사로잡기 위한 케이크의 변신과 진화는 눈물겹다. 이색적인 장식물로 포인트를 주거나 독특한 재료를 사용해 오감을 자극하는 것은 기본. 기교의 향연을 펼치듯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디자인으로 시선을 잡아끌거나 예술작품을 연상케 하며 탄성을 자아내기도 한다.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케이크도 있다. 백석대 외식학부 학부장이자 대한민국 제과명인인 신태화 교수는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소통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케이크는 창의성과 예술성을 갖춘 개성과 취향의 영역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소위 ‘스몰 럭셔리’, 작은 사치로 심리적 만족감과 위안을 얻는 트렌드와도 궤를 같이하는 셈이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이 내놓은 ‘메리 고 라운드’ 케이크

크리스마스는 제과업계 대목

크리스마스는 제과업계에서 연간 최대의 대목이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기간에 판매되는 케이크 양이 연간 판매량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현재는 그 정도로 집중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 기간이면 특수를 기대하게 마련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판매 성적, 입소문은 제과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 주도권과도 직결된다. 호텔과 유명 베이커리가 저마다 사활을 걸고 케이크 마케팅에 나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신 교수는 “보통 9월부터 크리스마스 시즌을 준비하는데, 트렌드와 정보를 파악하고 디자인을 구상해 제품을 만드는 과정이 긴밀한 작전처럼 이뤄졌다”면서 “12월25일까지는 초긴장 상태로 버텨야 했다”고 설명했다.

오랜기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태극당 버터케이크
나폴레옹과자점의 초코체리생크림케이크

크리스마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케이크.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선 케이크가 크리스마스에 빠질 수 없는 주인공이 됐을까. 정확한 시점을 특정할 순 없지만 한국전쟁 이후로 보는 의견이 많다. 피란지 부산에서 미군을 통해 서양의 크리스마스 문화가 전달되면서 확산되었으리라고 업계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인 태극당은 1950년대부터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었다. 초창기 선보였던 버터케이크는 지금도 태극당을 대표하는 메뉴다. 과거의 맛과 모습을 유지하면서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신경철 태극당 대표는 “매년 성탄절이 되면 2, 3대째 이어지는 고객들이 버터케이크를 사기 위해 찾아온다”면서 “추억과 향수를 그대로 전달해드리기 위해 한결같은 맛과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빵사관학교로 불리는 나폴레옹과자점의 초코체리 생크림 케이크도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베스트셀러다. 초코시트에 생크림과 다크체리를 층층이 얹어 만든 이 케이크도 추억의 맛을 잊지 못하는 고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창업주의 손녀이자 성북동 본점에서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강경원 파티시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가까워지면 케이크를 사기 위해 매장이 북새통을 이뤘던 기억이 난다”면서 “연세가 지긋한 손님 중에서는 지금도 초코체리 생크림 케이크의 원래 이름이었던 ‘기리슈케이크’를 달라고 주문하는 분이 있다”고 말했다.

기억하시나요, 버터·마가린 크림 케이크

케이크가 대중화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이때만 해도 버터나 마가린, 쇼트닝 등 고형 지방으로 만든 크림을 바른 케이크가 주류였다. 케이크의 크기도 지름 30㎝ 이상의 대형이 일반적이었다.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많았던 데다 특별한 날 먹는 간식이었기 때문에 모양과 맛은 물론 큼직한 부피로 눈과 입을 만족시켰다. 지금은 대세가 된 생크림 케이크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냉장기술이 발달한 1990년대부터다. 케이크 시트에 생크림을 발라 과일 등으로 장식한 생크림 케이크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버터크림이 진하고 무거운 맛이라면 생크림은 고소하고 신선하고 가볍다. 국내에 생크림 케이크가 처음 선보인 때는 1988년이다. 당시 서울 대치동에 있던 ‘여명제과’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크림 케이크를 판매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 제과점은 드라마 <수사반장>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배우 고 남성훈씨가 운영했던 곳으로, 그가 일본에서 먹어본 생크림 케이크의 맛에 반해 국내에 들여오게 됐다. 신태화 교수는 “제과업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충격적인 맛이었다”고 말했다.

뚜레쥬르 위글 베어볼 케이크

관련업계에서는 ‘크리스마스=케이크’ 공식이 뿌리내린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로 보고 있다. TV 광고를 통한 프로모션이 본격화되면서다. 파리바게뜨, 크라운베이커리 등 프랜차이즈 제과점들은 정우성, 김희선 등 톱스타들을 내세워 크리스마스 시즌 광고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거리에서 울리는 경쾌한 캐럴 사이로 퇴근길 사람들의 손에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는 모습은 크리스마스이브의 전형적인 모습이 된 지 오래다. 이제는 굳이 크리스마스 아니더라도 평소에 즐기는 간식이 됐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의 설렘과 감흥을 나누기에 케이크만 한 것을 찾기 힘들다. 수년 전부터는 전통적인 케이크 외에도 크리스마스 문화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크리스마스에 즐기던 슈톨렌, 뷔슈 드 노엘, 구겔호프, 파네토네 등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슈톨렌이 지난해 큰 인기를 끌자 올해는 시중 제과점에서 슈톨렌을 일찌감치 내놓으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달구고 있다. 뚜레쥬르와 같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는 깜찍하고 친근한 캐릭터 장식물로 케이크를 꾸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신라호텔의 더 테이스트 오브 럭셔리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호텔가의 자존심 경쟁으로까지 이어진다.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고 화려한 디자인으로 치장한 케이크를 앞다퉈 내놓는다. 동시에 값도 경쟁적으로 올리는 양상이다. 올해 주요 호텔 케이크들은 20만원대를 웃돈다. 지난해에 25만원짜리까지 나오면서 케이크 가격이 입방아에 올랐으나 올해는 값이 더 뛰었다. 이달 1일 신라호텔은 크리스마스 케이크 라인업을 주요 호텔 중 가장 늦게 발표하면서 30만원짜리 케이크를 내놨다. 신라호텔뿐 아니라 대부분 호텔이 내놓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가격은 매년 가파르게 올랐다. 호텔들은 최고급 재료를 사용해 한정판으로 소량 생산하는 데다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가 예술작품을 빚어내듯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기 때문에 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케이크는 빠른 시간 내에 매진된다. 특정한 소비 집단에 한정된 품목이기는 하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이 같은 가격 책정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70여년 전 크리스마스에 케이크가 등장하던 시절에도 비싼 케이크를 바라보는 심정은 비슷했던 것 같다. “케이크점에는 거대한 케이크들을 만들어 싼타크로스의 꿈을 부르고 있으나 겨우살이가 앞서는 시민들에게는 아무리 사사오입을 해도 꿈에도 생각 못할 비싼 가격들이다.”(1954년 12월13일자 동아일보)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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