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면은 눈썰매장, 연못은 스케이트장…사계절 내내 변하는 공원은 ‘커다란 놀이터’[다른 삶]
도시 곳곳에 들어선 크리스마스 마켓, 두툼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잔인하리만큼 적은 일조량, 그리고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도시 곳곳에 각기 썰매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 내 머릿속을 스치는 베를린의 겨울 풍경이다.
베를린에는 곳곳에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역할은 사계절 내내 부지런히 바뀐다. 봄이면 맑은 공기를 제공해주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사람들이 햇볕을 쬐고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여유로운 공간을 내어줬다. 빼곡히 들어서 있는 놀이터는 아이를 키우는 가족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다. 이렇듯 삶의 다양한 배경이 돼주는 도심 속 공원은 이곳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낙엽이 지고 날씨가 추워지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공원들은 한 번 더 변신한다. 녹지로 뒤덮인 비탈면은 눈썰매장이 되고, 비탈면 끝에 있는 연못은 스케이트장이 된다. 오직 자연요소로만 이루어진 공원은 커다란 놀이터가 된다.
유독 눈이 많이 내리는 베를린에 사는 아이들은 저마다 썰매를 들고 이 공원을 찾는다. 어릴 적 우리가 동네에서 즐겨 타던 비료 포대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무 썰매부터 브레이크가 달린 플라스틱 재질의 스키장 썰매, 비행기 날개처럼 생긴 손잡이가 달린 1인용 썰매, 자동차 모양의 썰매까지 다양한 아이들의 개성만큼이나 썰매의 종류와 재질, 타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처음 이런 풍경을 마주했을 때 무척이나 생경했다. 눈이 펑펑 내려 온 세상이 하얀 겨울 나라가 된 기쁨은 이해하지만, 스키장에서나 봄 직한 차림을 하고 썰매를 든 채 길거리를 바쁘게 지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색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지가 동네 공원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한겨울 눈 덮인 동네 공원은 추운 겨울날 산책하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니기에 분명한 목적 없이는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난 뒤 그 대열에 함께하게 되면서 어색함은 고마움으로 변했다. 청소년부터 젊은 연인들, 심지어 아기띠를 한 채 썰매를 타는 아빠들의 모습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자연 속 눈썰매장의 생생한 풍경이다.
도시 곳곳에 있는 널찍한 공원은 한겨울 아이들이 썰매를 타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다. 녹지길, 비탈길 가릴 것 없이 모든 곳에 골고루 푹신하게 뒤덮인 하얀 눈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자극한다. 일상의 산책로와 상관없이 썰매가 잘 미끄러지는 방향으로 그저 썰매를 즐길 뿐이다. 넓게 트인 공원에서 모여 까르르 웃으며 썰매를 타야 하기에 두툼한 장갑과 모자, 썰매는 겨우내 언제든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베를린에 사는 아이들은 저마다 썰매 들고 공원 찾아
나무 재질부터 브레이크가 달린 플라스틱 재질의 스키장 썰매, 자동차 모양의 썰매까지 제각각
아이와 썰매 타는 추억 만들며 도심 속 공원의 양과 질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봐
보통 넓은 녹지 공간에는 비가 많이 오는 때를 대비해 비탈길 끝에 호수를 조성한다. 겨울의 호수는 아이들에게 그저 꽝꽝 얼어붙어 스케이트를 탈 수 있기를 바라는 공간일 것이다. 베를린의 조경 건축가는 겨울의 이런 풍경까지 고려해 호수를 만들어둔 것일까.
올해는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가 있어 썰매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갑자기 수요가 급증하는 탓에 썰매를 사는 것도 쉽지 않고, 중고 썰매도 금세 동이 났다. 중고거래에 웃돈까지 제안하는 기이한 상황도 벌어졌다.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대충 봐도 족히 십수 년은 되어보이는 오래된 중고 썰매들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는 점이었다. 과연 저 썰매가 제 기능을 할까 의문을 품었지만 가격은 신제품 못지않았다.
코로나19가 정점으로 치닫던 2020년 겨울, 우리 아이는 두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걷기는 하지만 썰매를 탈 정도로 성장하진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해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오랜만에 ‘겨울다운 겨울’을 본 우리는 지인들과 공원으로 향했고 그때 처음 ‘동네 눈썰매장’을 경험했다.
우리 일행은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해 여름에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플라스틱 욕조를 썰매 삼아 놀았다. 처음엔 놀기 바빠서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한참을 놀다보니 여기저기서 안정적으로 미끄러져가는 썰매가 부러워 한참을 쳐다봤다. 그때 모두가 투철한 ‘부모 정신’을 느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제대로 된 썰매를 구하리라.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기회는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가격의 중고 썰매를 사느니 조금 참아보자는 전략으로 신상품을 기다렸다. 마침내 이듬해,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 전 우리 가족은 새 썰매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해 겨울엔 유난히 눈이 내리지 않았다. 눈이 오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춥지도 않았다.
지난해엔 직접 눈을 찾아나섰다. 한국의 강원도나 유럽의 알프스처럼 다른 지역들보다 눈을 쉽게 만날 수 있어서 사람들이 겨울스포츠를 활발하게 즐기는 지역, 하르츠였다. 독일의 남부 바이에른 지역만큼은 아니지만 하르츠는 베를린에서 차로 3~4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일단 좋은 곳이다.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과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우리에게 딱 맞았다. 그렇게 야심 차게 큰 썰매를 차에 싣고 떠났지만, 부슬부슬 겨울비만 맞고 돌아왔다. 날씨 운도 없었다. 포근한 겨울 날씨에 회색 경치만 실컷 감상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2년 가까이 창고에서 잠자코 있던 썰매를 본격적으로 개시한 건 이번 겨울이었다. 어느덧 4세 반이 된 첫째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정말 썰매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기대보다 더 훌륭한 썰매의 품질에 감탄한다. 나를 포함해 두 아이가 앞뒤로 앉아서 대략 100㎏을 훌쩍 넘는 무게에도 끄떡없이 언덕 아래로 사람을 실어 나른다. 이건 뭐, 카이스트 학생들도 울고 갈 과학이다.
여전히 오래돼 보이는 나무 썰매를 타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예전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보고는 오래된 나무 썰매라고 무시했던 그 썰매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오래돼 고개를 가로저었던 썰매들이 지금도 저렇게 튼튼하게 제 기능을 한다니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독일인들이 대대로 물려주는 물건 중에 썰매를 포함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집 주변에 공원이 없었다면 아이와 이런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까. 나도 모르게 “엄마 아빠가 어렸을 적엔”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한 번은 아이에게 “엄마 아빠는 동네 비탈길에서 눈이 오는 날이면 썰매를 타곤 했어. 썰매가 없으면 어른들이 직접 뚝딱뚝딱 만들기도 했었지”라고 설명했다. 얼마만큼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 부부의 기억만큼이나 이 아이들에게도 지금의 추억이 행복하게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겨울 아이들의 눈썰매 타는 풍경을 통해 도심 속 공원의 양과 질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다니 참 흥미롭다. 공원이 늘어난다고, 적절한 양의 눈이 온다고 해서 한국의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 동네에서 썰매를 타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베를린에 실내 썰매장을 만든다고 하면 과연 사람들이 이용할까 의문이 든다. 뭐, 그러면 어떤가. 이렇게 우리 부부가 성장해온 배경과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는 풍경의 다름 속에서 흥미와 즐거움을 발견하려 애쓰며 살아가면 되는 거지.
2022년 초 팬데믹이 곧 끝날 것이라 희망하며 봄을 기다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번의 사계절을 겪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셋에서 넷이 됐다. 매년 지나가는 사계절은 닮은 듯 다르다. 아이들이 자라나며 생겨나는 이야기가 변하듯 어른들도 나이가 들어가며 변화하고 우리 일상의 풍경도 지속해서 바뀔 것이다.
이 무궁한 변화 속에서 유일하게 변함없는 것은 겨울을 지내며 다가올 따뜻한 봄을 기다린다는 사실이다. 눈에 뒤덮인 눈썰매장이 다시 푸른 공원이 되고, 새싹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놀이터에서 뛰어놀 날을 우리 아이들은 기다릴 것이다. 나도, 그땐 또 잔디밭에 벌렁 누워 차갑고 달곰한 아이스크림을 즐기겠지.
<연재 끝>
▶신혜광·이은혜
건축설계사무실에 다니는 닭띠 아빠와 그림을 그리는 돼지띠 엄마, 돼지띠 첫째 아이와 최근 태어난 토끼띠 막내까지 베를린에 거주 중인 4인 가족이다. 단독주택에 사는 것, 자동차로 베를린에서 나폴리까지 여행하는 것이 꿈이다. <스페인, 버틸 수밖에 없었다>와 <어느 멋진 일주일, 안달루시아>를 쓰고 그렸다.
신혜광·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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