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문장으로 써내려간 양심의 기록…'이처럼 사소한 것들'

김용래 2023. 12. 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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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실업과 빈곤에 혹독한 겨울이 겹친 아일랜드의 소도시 뉴로스의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아침.

부유하진 않지만, 다섯 딸을 두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던 석탄 상인 빌 펄롱은 동네 수녀원으로 석탄 배달을 나갔다가 그곳 창고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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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일랜드 문학 이끄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
80년대 아일랜드 배경 사회소설…작년 부커상 최종후보 올라
[다산책방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1985년 실업과 빈곤에 혹독한 겨울이 겹친 아일랜드의 소도시 뉴로스의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아침. 부유하진 않지만, 다섯 딸을 두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던 석탄 상인 빌 펄롱은 동네 수녀원으로 석탄 배달을 나갔다가 그곳 창고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잔인하고 불법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아이를 돕고 싶어 하지만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못 본 척하라고 조언하며 침묵을 강요한다. 수녀원을 비롯한 가톨릭 공동체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이 마을에서 안온한 삶을 누리던 펄롱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용기를 내야 할지 아니면 남들처럼 불의와 부정을 못 본 척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다산책방)은 키건의 장기라 할 수 있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 또는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하기 등의 작법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원인을 제공한 수녀원이나 종교에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대신, 주인공이 삶에서 느낀 비참함이나 감동의 순간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나간다.

키건의 섬세한 문장들은 적은 수의 단어로도 단박에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극적 분위기를 효율적으로 만들어 내고, 때로는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런 키건의 문체는 주인공이 불편하고 어두운 진실에 서서히 다가가 마침내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안온한 일상을 깨버릴 수도 있는 결정을 하게 되는 스토리에 무척 잘 들어맞는다.

작가는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이라는 아일랜드 가톨릭교회의 부끄러운 과거에서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가톨릭 수녀원이 '성 윤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여성들을 교화하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운영했던 시설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죄 없는 소녀들과 미혼모 등 여성들이 감금된 채 폭행과 성폭력, 학대와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이들이 낳은 아기들 또한 방치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70년이나 자행되던 인권 유린을 사실상 묵인했던 아일랜드 정부는 2013년에야 뒤늦게 공식으로 사과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요즘과도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모두가 행복한 성탄절을 기다리며 마음이 들뜨는 시기에 사회의 구석지고 어두운 곳엔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존재들이 늘 있다는 걸 다시금 일깨운다.

이 작품은 지난해 영국 최고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본상의 최종후보에 오르고 같은 해 영국 오웰상의 픽션 부분을 수상하는 등 평단에서도 큰 찬사를 받았다.

다산책방. 홍한별 옮김. 132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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