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다독이는 詩의 위로[살며 생각하며]
황혼이혼은 깊은 아픔 주지만
삶은 엄중히 극복하라고 요구
사람은 각자 삶의 짐 지고 살아
고난을 견뎌내며 더 성숙해져
詩는 상처 보듬어주는 치유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줘
우리나라도 초고령화사회로 진입하면서 황혼이혼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배우자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하면 상대방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지난 11월에 열린 제5회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개막작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원제 ‘Hope Gap’)은 결혼 29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다른 여자가 있다며 집을 나가겠다는 남편 에드워드(빌 나이 분)의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는 주인공 그레이스(아네트 베닝 분)와 부모를 사랑하는 아들 제이미(조시 오코너 분)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글래디에이터’와 ‘레 미제라블’의 각본가 윌리엄 니컬슨의 감독 데뷔작이다. 1999년 그의 각본으로 공연한 연극을 영화화했으며, 부모의 이혼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되었으므로 아들 제이미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시를 엮어 시선집을 만드는 솔직하고 격정적인 성격의 그레이스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조용하고 신중한 에드워드는 성격은 다르지만 서로 맞춰 가며 살고 있었는데, 남편의 충격 선언으로 가족의 심경은 폭탄을 맞은 듯하다.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리얼하면서도 격조 있는 대사와 장면과 어울리는 시구다. 에드워드와 그레이스가 처음 만난 인연도 시가 이어주었다. 젊었을 적 에드워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넉 달이 지났는데, 기차 좌석에서 자신도 모르는 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맞은편에 앉았던 젊은 여성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사연을 묻고는 헨리 킹이 죽은 아내를 위해 쓴 시로 위로해 주면서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가 그레이스였다는 것이다. ‘날 위해 거기 머물러 주오/그 텅 빈 골짜기에서 그대를 만나고 말지니/내가 늦는다는 생각은 마오/난 이미 가는 중이니’라는 시구는 에드워드에게 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전 그 기차는 잘못 탄 기차였고, 그 기차를 타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며 사랑을 주는 안젤라(샐리 로저스 분)를 만나면서 그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울 수 없다. 죄책감이 든다는 아버지의 말에 “인생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하면서 제이미는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엄마 그레이스가 고통을 호소할 때도 “각자 삶의 짐을 지고 살아가지만, 엄마는 앞서가는 탐험가예요”라면서 엄마에게 용기를 준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촬영지 영국 남동부 시퍼드의 세븐시스터스 절벽이 있는 언덕에서 그레이스는 패러글라이딩을 준비하는 동네 청년에게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예이츠의 ‘한 아일랜드 비행사의 죽음 예언’의 시구 ‘즐거움에 대한 고독한 충동이 구름 속의 이런 난장판으로 몰고 왔다’를 읊어준다. 시선집을 책으로 내지 말고 인터넷으로 검색되도록 하자는 제이미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사이트의 제목은 ‘여기 한번 와 본 적이 있다’라는 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븐시스터스 공원은 영화 ‘어톤먼트’ ‘브레이브 하트’ 등의 촬영지로,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닷가의 아름다움과 일렁이는 파도도 인물의 심리를 그리는 역할을 하며 장면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음악도 감정선을 조용히 따라간다. 슬픈 그레이스의 고독한 마음은 모차르트의 ‘대미사 C단조’에 실린다. 종교음악이면서 모차르트가 사랑한 콘스탄체에 대한 결혼 서약을 지키기 위한 사랑의 의지가 담긴 음악이다. 주제와도 맞는 장중한 곡조에, 그레이스의 마음에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
황혼이혼의 아픔은 깊은 상처를 주지만, 삶의 엄중함은 이를 극복하면서 살아 내도록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제이미의 내레이션은 의미가 깊다. 오프닝에서는 호프갭에서 재미있게 노는 어릴 적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때는 엄마가 행복한지 관심도 없었다며 ‘다들 그렇지 않나’라고 시작하지만, 엄마의 아픔을 보며 한층 성숙해진 제이미는 엔딩에서 부모님께 시를 바친다. ‘나의 어머니, 나의 첫 여성/나의 온기, 나의 위안’으로 어머니에 대한 존경을 바치며, ‘나의 아버지, 나의 첫 남성/나의 스승, 나의 심판자/ 나의 미래’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담는다. ‘당신들의 고통이 제 고통이며, 당신들이 견뎌내면 저도 견딜 겁니다. 제 손을 잡고 함께 그 길을 걸어요’라는 제이미의 고백은 상처가 우리를 얼마나 성장시키는지 눈물겹게 드러낸다.
‘투쟁해 봤자 허사라고 말하지 말라’는 제목의 시선집에 나오는 ‘저 뒤쪽에선 작은 개울과 만을 이루며’라는 시구는 하얀 세븐시스터스 앞쪽이 아니라, 뒤쪽 호프갭으로 불리는 곳이 영화의 주요 장소라는 점과 딱 맞아떨어진다. 시는 그레이스의 상처 치유제가 된다. 관객은 영화 속 시와 함께 자신의 아픔과 만날 것이고, 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지친 파도가 헛되이 부서지며 이곳에선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듯하나/저 뒤쪽에선 작은 개울과 만을 이루며/조용히 밀려오고 있지 않은가/ 햇살이 들어올 때 동쪽 창으로만 들어오지 않으니/앞에서 본 태양은 천천히 솟아오른다. 얼마나 느린가/하지만 서쪽을 보라. 밝게 빛나는 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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