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목장 관리’ 숨은 요직… ‘뒷돈’ 챙기는 부정·부패 사건도 빈번[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입력 2023. 12. 8. 09:24 수정 2023. 12. 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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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23) 궁궐에서 가장 많은 인력을 부리는 사복시
말 조련·치료 등 책임 맡아
궁궐 관청중 딸린 식구 최다
관원 외 일꾼 등 600명 넘어
목장 말숫자 관리 ‘점마별감’
좋은 집안 출신이 자리 꿰차
중국 진헌할 말 바꿔치기하고
빼돌려 팔아 이익 챙기기도
새 관리에 ‘말값’ 받기 폐습도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1. 알고 보면 매우 중요한 관청, 사복시

사복시(司僕寺)는 수레와 말, 그리고 목장에 관한 일을 맡은 곳으로 고려 시대 때부터 있던 관청이다. 사복시는 내사복시와 외사복시가 있는데, 내사복시는 경복궁 영추문 안쪽과 창경궁 홍문관 남쪽에 있었고, 외사복시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었다. 따라서 궁궐에 근무하는 사복시 관원은 내사복시에 한정된다.

사복시의 소속 관원으로는 제조 2인이 있고, 그 아래로 정3품의 정 1인, 종3품 부정 1인, 종4품 첨정 1인, 종5품 판관 1인, 종6품 주부 2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안기 1인, 조기 1인, 이기 2인, 보기 2인, 마의 10인이 예속되어 있었다. 종6품 안기부터 종9품 보기까지는 모두 잡직관이다.

잡직관들의 임무를 살펴보면 안기(安驥)는 말을 조련하고 보양하는 임무를 총괄하는 직책이다. 종7품 조기(調驥)는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책임진 관리고, 종8품 이기(理驥)는 조기와 함께 가마와 수레를 관리하는 직책이며, 종9품 보기(保驥) 역시 조기와 이기를 보조하여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품계가 없는 마의(馬醫)는 말을 치료하는 의사를 말합니다.

사복시에는 이들 관원 외에도 서리가 15인이 있고, 그 아래 일꾼 600인, 차비노 14인, 근수노 8인, 이마 4인, 견마배 11인, 고직 4인, 대청직 1인, 사령 11인, 군사 2인이 배치되었다. 차비노와 근수노는 심부름하는 관노이며, 이마는 말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또 고직은 창고지기를 말하며, 대청직은 건물관리인이며, 사령은 관아를 지키거나 심부름하는 나졸을 일컫는다.

이렇듯 사복시는 궁궐 속 관청들 중에서 딸린 식구가 가장 많은 조직이었다. 거기다 사복시는 각 지역의 목장을 관리하는 업무도 있었기 때문에 지방 조직도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지방의 목장 수는 53개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지방의 목장 수는 87개,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목장 수는 114개, ‘증보문헌비고’에는 209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목장들은 각 도의 관찰사 관할 아래 감목관이 지휘·감독하였고, 감목관 아래로는 군두·군부·목자 등 말을 생산하고 관리하기 위한 많은 인원이 배치되었다.

조선사회에서 말은 가장 요긴한 이동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동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목장 관리는 군사력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 따라서 사복시는 알고 보면 조선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관청이었다.

2. 누구나 탐냈던 점마별감 자리

사복시에는 각 도의 목장에서 기르는 말을 점고(點考), 즉 숫자를 세고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별감이 있었는데, 이들을 점마별감(點馬別監)이라고 했다. 실록에는 이 점마별감들에 얽힌 사건들을 많이 전한다. 주로 이들이 저지른 부정에 관한 일들인데, 태종 10년(1410년) 7월 12일의 기사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유겸이 북경에서 돌아와 말하였다. “박희중·최진성이 점마별감으로 의주에 이르러 역환(易換) 마필을 점고하여 보내는데, 의주 등처의 군민의 요구에 따라, 임의로 진헌할 좋은 말과 군민의 나쁜 말을 바꾸어 해송(解送)하였습니다.”

내용인즉, 중국에 진헌할 말을 바꿔치기했다는 것인데, 이 말을 듣고 태종은 즉시 순금사로 하여금 그들을 조사하게 했고, 결국 유겸의 말이 사실로 밝혀졌다. 순금사의 조사에 의하면 박희중이 바꾼 말은 24필이었고, 최진성이 바꾼 말은 22필이었다. 이를 장물로 계산하면 참형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였다. 하지만 태종은 이들을 죽이지는 않고 유배형으로 끝냈다. 둘 다 한성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식들인 데다 박희중은 이조 정랑, 최진성은 예조 정랑이라는 요직에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점마별감들 중에는 말을 바꿔치기하는 것을 넘어 아예 말을 빼돌려 팔아먹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 23년(1441년) 3월 2일의 일이다. 경기의 점마별감을 맡은 사복시 직장 배지눌과 충청의 점마별감을 맡은 사복시 윤 이완이 각각 목장의 말을 팔아먹었다는 고발이 있었다. 세종은 곧 이들을 사헌부로 잡아와 추국하도록 했다.

우선 배지눌은 추국 끝에 말 6필을 팔아넘겼다는데, 3필은 자신의 아버지의 종에게, 그리고 나머지 3필은 역리의 이름을 도용하여 별도로 팔아넘겼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조사해보니, 말을 산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 했다. 그러자 세종은 그들을 의금부로 넘겨 다시 추국하도록 했다.

배지눌과 함께 이완도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도록 했는데, 역시 말의 행방이 묘연했다. 결국, 말을 산 자들은 밝혀내지 못한 채 둘 다 장 100대에 도(徒·감옥살이) 3년에 처했다. 그런데 이완은 공신의 아들이라 귀양 보내는 것으로 종결되었고, 배지눌만 결장 100대를 맞고, 3년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이 두 사건 외에도 실록엔 점마별감들이 말을 빼돌리거나 바꿔치기한 사건이 많이 등장한다. 또 점마별감으로 파견된 자들은 한결같이 좋은 집안 출신의 관리들이었다. 이는 곧 누구나 점마별감 자리를 탐냈다는 뜻이다. 물론 그만큼 뒤로 챙기는 이익이 보장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 사복시에 바치는 말값

조선 초에 관리가 막 된 신참들은 사복시에 말값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1401년 윤 3월에 태종이 이와 관련하여 경연 중에 이런 질문을 한다.

“일찍이 들으니, 사복시에 신참의 말값을 바치는 법이 있다던데, 사실인가?”

그러자 시독관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태종이 다시 물었다.

“처음에 이런 법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시독관이 다시 대답했다.

“예전에 참외관(參外官)은 말을 타지 못하고, 배참(拜參)하여 말을 준 연후에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값을 바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말을 주는 법은 없어지고 값을 바치는 법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참외관이란 정7품 이하의 무관 잡직을 일컫는다. 또 배참이란 지방으로 내려갈 때 쉬어갈 역참을 배정받는 것을 일컫는다. 말하자면 말값이라는 것은 무관 잡직들이 관직을 받고 배속되면 궁궐에 들어올 때 말값이라고 하여 사복시에 일종의 통과세를 낸 것을 의미한다. 사실, 조선 시대의 잡직들은 대개 이런 통과세를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다. 지방관들도 발령이 나면 궁궐을 지키는 문지기나 별장들에게 통과세를 내야만 궁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태종은 이런 관행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말을 주고 그 값을 바치게 하는 것도 틀린 일인데, 하물며 말을 주지 않고 값을 바치게 하는 것이겠는가. 의정부에 내리어 없애도록 하라.”

하지만 이런 왕명에도 불구하고 사복시 관원들은 말값을 계속 받았다. 사복시 관원들 중 잡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말값이 아주 중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암암리에 계속 받아 챙겼던 것이다.

작가

■ 용어설명 - 잡직(雜職)

조선 시대 문반 또는 무관의 정직 이외에 천인들이 종사하던 관직이다. 이들이 정직(正職)에 임명될 경우에는 체아직 때의 품계에서 1품계를 낮추었고, 최고품계는 정6품으로 한정되었다. 액정서·공조·교서관 등의 문반 품계직과 파진군·대졸·팽배·도화서 등의 무반 품계직이 속해 있었다. 그곳에 제수된 자는 대부분 양인 이하 천인인 까닭에 점차 천역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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