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아홉 숲의 긴 봄' 십 리 숲길

현경숙 입력 2023. 12. 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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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 닦으며 가는 산사 길
햇빛 드리운 장춘숲길[사진/백승렬 기자]

(해남=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2023년 계묘년이 저물고 2024년 갑진년이 밝아온다.

한 해를 떠나보내자니 끝과 시작의 감회가 새롭다. 땅끝 해남은 한반도 땅의 시작 지점이기도 하다. 끝과 시작이 반드시 다른 것은 아닐 거라고 마음에 새겨본다.

끝은 또 다른 시작

해남의 큰 가람인 대흥사 입구에는 '아홉 숲의 긴 봄'으로 불리는 걷기 길이 있다.

십 리 장춘(長春) 숲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산사 가는 길'이다.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 양산 통도사 무풍한송로, 평창 오대산 선재길, 순천 선암사 진입로 등과 함께 지역민과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 불심 길이다.

장춘 숲길에는 차나무가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 옆에는 밤톨만 한 열매들이 달려 있다.

꽃이 지고 난 뒤 열매를 맺는 대부분의 식물에서 꽃과 열매를 동시에 보기는 어렵다.

차나무는 꽃 피는 시기에 열매도 맺는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에 속한다. 차나무 열매는 여무는 데 약 1년 걸린다. 이 때문에 꽃과 1년 전에 열린 열매를 한 나무에서 동시에 볼 수 있다.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힌 차나무[사진/백승렬 기자]

떨어지기 직전의 시든 꽃 옆에 맺힌 싱싱하고 단단한 열매는 시작과 끝이 하나임을 웅변하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나 할까.

빨간 동백꽃도 다소곳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곳 동백꽃은 10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이듬해 5월까지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가을 끝자락, 매서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이 숲에 붙은 '긴 봄'이라는 이름은 과장이나 호들갑이 아닌 것 같았다.

한반도 육지의 최남단인 해남에는 아열대성 상록 활엽수가 많다. 장춘숲도 그랬다.

해남 땅끝탑과 해넘이[사진/백승렬 기자]

한겨울에도 수목이 싱싱한 푸르름을 자랑하니 '장춘'이라는 찬사에 인색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의 끝은 내일의 시작이다.

'오는 것을 거절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며 자신에게 잘 대해 줄 것을 바라지 말고, 지나간 일을 원망하지 말라'. 초기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구절이다. 계묘년을 유쾌하게 떠나보내고 갑진년을 힘차게 맞아야겠다.

십 리 장춘숲길

대흥사가 자리 잡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九林里)의 지명 '구림'은 두륜산 8개 봉우리에서 내려오는 계류가 구곡수를 이루고, 수풀이 우거진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다.

단풍 물든 장춘숲길[사진/백승렬 기자]

선인들은 두륜산 팔봉이 아홉 숲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행정 지명은 '구림리'이지만 '장춘동' '장춘마을'이라고도 불린다.

장춘 숲길은 대흥사 불교 문화유산 안내소에서 시작해 대웅전에 이르는 약 4㎞의 길이다. 주로 계곡을 따라 나 있다.

수종이 다양해 형형색색의 단풍이 화려했고 하늘을 가릴 만큼 숲이 짙었다. 즐비한 동백나무 노거수, 피톤치드 향이 강한 편백 군락지, 상사화 군락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굽이치는 계곡에는 예부터 현무교, 운송교 등 9개의 다리가 나 있었다. 다리는 현대에 와서 두어 개 더 늘었다.

만추로 가는 길목에서 '아홉 숲'은 새벽 탐방객들을 한껏 품어주고 있었다.

지역 주민이거나 템플스테이 참가자로 보이는 산보객들은 빠른 걸음으로 운동하거나, 만보 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안내소 바깥에 차를 세워놓고 장춘 숲길 4㎞를 왕복한 뒤 귀가하는 주민도 많았다.

아침 산사에서 생각을 가다듬고 그윽한 숲 향기를 맡으며 8㎞가량을 걷는 것만큼 흐뭇하고 건강한 하루의 시작도 드물 것 같았다.

아름답게 단풍 든 고목[사진/백승렬 기자]

'아홉 숲의 긴 봄' 숲길은 대흥사 일주문 안 구간과 바깥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일주문 바깥 구간에는 상사화 군락지, 편백 군락지, 동백 군락지, 5·18 민주화 항쟁 사적지인 대흥사 앞 여관 터, 한국 최초의 여관인 유선관, 비구니 암자인 백화암 등이 있다.

안쪽 구간에서는 부도밭, 해탈문, 500년 느티나무 연리근, 금당천, 침계루 등을 볼 수 있다.

1980년대 안내소 주변에는 숙박시설이 많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위대와 해남 주민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인 뒤 이곳에 도착하자 숙박업소와 주민들은 시위대에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다.

1914년 지어진 유선관은 영화 '서편제' '장군의 아들' 등이 촬영된, 운치 있는 곳이다. 현재 한옥 호텔,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시내를 베고 구름 이불을 덮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서산대사, 초의선사 등 대흥사를 빛낸 고승들의 승탑을 모아놓은 부도밭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부도 56기, 탑비 17기가 모셔져 있다.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으로, 비문을 새긴 탑비는 부도 근처에 세운다.

서까래, 부연, 기왓골이 가지런히 새겨져 목조건물 지붕을 떠올리는 옥개석을 이고 있고 다람쥐, 용머리 등이 새겨진 서산대사 부도는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뛰어나 보물로 지정돼 있다.

서산대사 부도[사진/백승렬 기자]

대흥사를 차의 성지로 만든 초의선사 부도에는 '草衣塔'(초의탑) 글자가 선명했다.

대흥사에는 불법 수호신들을 모신 사천왕문이 없다.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두륜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에 있는 천관산, 선은산, 달마산, 월출산 등 명산들이 사천왕을 대신해 대흥사를 지킨다.

박미례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는 "해탈문 지나 고개를 들면 큰 원을 그리는 두륜산 능선과 파란 하늘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하얀 구름이 점점이 떠 있을 때면 구름 이불을 덮은 듯한 정취에 젖는다"고 귀띔했다.

해탈문에서 바라본 두륜산 능선[사진/백승렬 기자]

길은 금당천, 침계루를 지나 대웅보전 앞에서 끝난다. 침계루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 명필 원교 이광사가 썼다. 바위에 부딪히며 흐르는 계류를 떠올리는, 유연하고 자유로우면서 회화적인 자체이다. '枕溪'(침계)는 '시내를 베다'는 뜻이다.

정갈한 금당천을 베고 누운 서정이 대웅전으로 향하는 불심을 적신다.

500년 된 느티나무 연리근[사진/백승렬 기자]

금당천 옆에 추정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 연리근이 있다. '연리'(連理)는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합쳐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 하나가 되는 것이다. 뿌리가 하나가 되면 연리근, 가지가 합쳐지면 연리지, 줄기가 결합하면 연리목이라 부른다.

두 몸이 하나가 된 나무는 연인의 사랑에 비유돼 '사랑 나무'로도 불린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의 시 '연리목 신화'의 글귀가 새롭다. '우리가 서로를 보듬고 몸부림치는 뜨거운 사랑은 태초의 별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흥사 별밤[사진/백승렬 기자]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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