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도 우산 필요한데…나한테 빌려줘 고마워요♥"[인류애 충전소]
"비 맞지 않았음 싶어서…'우산 쓰고 갈래?' 건네주고 황급히 도망쳤지요."
2주 뒤 길에서 알아보고, 잊지 않고 우산 돌려주고, 손편지와 간식까지 선물해준 기특한 초등학생
몽글몽글 이웃간의 정(情)…"이웃 간 단절 안타까웠어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니까요."
[편집자주] 세상도 사람도 다 싫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래도 어떤 날은 소소한 무언가에 위로받지요. 구석구석 숨은 온기를 길어내려 합니다. 좋은 일들도 여전하다고 말이지요. '인류애 충전소'에 잘 오셨습니다.
열여섯 살, 중3인 전현서 학생은 등교 준비 중이었었지요. 비 온단 걸 알고 우산을 챙겼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1층 현관에 내려왔을 때, 3~4학년쯤 돼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어요.
이미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우산을 거의 다 안 가져온 거였습니다.
쓸 수 있는 우산에 몇몇이 낑겨서 가고, 한 여자 아이만 남았습니다. 아이는 야속한 하늘만 보며 고민했습니다. 집은 고층, 아침 시간이라 오래 기다려야 하는 엘리베이터. 다시 올라갔다 오면 학교에 지각할 게 뻔했거든요.
현서양은 그걸 잘 알기에 염려했습니다. 지각하지도, 비 맞지도 않게, 자기 우산을 빌려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망설였습니다. 실은 모르는 아이였고, 괜한 관심이 아닐까 싶었거든요. 현서양 성격이 내향적인 편이기도 했고요.
잠시 머뭇거리다 현서양은 불끈 용기를 냈습니다.
"저기…이 우산 쓰고 갈래?"
두 달이 지난 뒤 메일이 왔다. 현서양이었다. 작은 선의(善意)가 이리 관심 받을줄 몰랐다며 얼떨떨하단다. 괜찮다면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학교와 학원 사이 틈을 내어, 인근 카페에 와준 그의 첫인상은 예상처럼 따스히 또 은은하게 빛났다. 초코라떼로 고마움을 전하며 그날 이야길 나눴다.
형도 : 우산이 없던 이웃 초등학생. 그치만 알던 아이는 아니었을텐데요.
현서 : 맞아요.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얼굴만 몇 번 봤었지요.
형도 : 그런데 하나뿐인 우산을 내어준 거고요. 어떤 맘이었나요.
현서 : 저는 버스타고 학교 가면 금방이니까 비도 별로 안 맞거든요. 빌려줘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동생 같기도 했고요. 아이가 망설이며 집에 다녀올까 말까 고민하더라고요. 근데 엘리베이터가 한 대라, 아마 올라갔다 내려오면 지각할텐데 싶었지요. 그럼 선생님 눈치도 보이고 하잖아요.
형도 : 초등학생 때 지각한 경험에서 우러나신 걸테고요.
현서 : 종종 그랬어요(웃음). 고민되더라고요. 빌려주는 게 너무 오지랖인가 싶어서요. 드라마 주인공처럼 괜히 그런 걸까 싶었고요.
형도 : 그럼에도 우산을 건네기로 결심한 계기는요.
현서 : 비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우산을 빌려주면, 좀 이상하게 생각해도 비는 안 맞겠구나 싶었어요.
형도 : "우산 쓰고 갈래?" 그러니까 초등학생 친구가 뭐라고 하던가요.
현서 : 처음엔 손사래치면서 "어…괜찮아요"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아니야, 누나가 빌려줄게"하고 손에 쥐어주고 도망치듯이 돌아서서 뛰어갔지요. 누나가 아니라 "언니가 빌려줄게"라고 해야하는데, 제가 사촌 남동생들이 많아서 그만(웃음).
학교 정문에서 선생님이 현서양을 걱정하며 말했다. "우산 좀 가지고 다녀라." 현서양은 웃으며 이리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머리와 몸은 젖었으나 맘은 한없이 뿌듯했단다. 하교 길엔 친구 우산을 다행히 빌려서 쓰고 왔다. 언제나 궁금한 건 이런 거였다.
형도 : 아파트 1층에서 초등학생을 만난 그 장면 말이에요. 거기로 다시 돌아가보면요. 대부분은, 우산을 펼쳐서 쓰고 갈 길을 가지요. 우산이 두 개였던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유난히 눈에 밟히고, 신경 쓰이는 그 마음. 원래 그런 편이었나요.
현서 : 평소에도 도움 필요한 사람 있으면 마음을 많이 써요. 내향적이라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긴 해도요. 다른 사람이 이제 그 사람을 도와줄 때까지 계속 눈여겨보고, 그런 거지요.
형도 : 예를 들면 어떤 일인 걸까요.
현서 : 이제 누가 가다가 물건을 흘리거나 하면, 제가 용기가 안 날 땐 다른 사람이 주울 때까지 서성이기도 하고요. 용기를 내서 주워드리기도 해요. 길을 몰라 헤매시는 것 같으면 가서 알려드린 일도 많았어요.
그로부터 2주 정도 지났을 때였다.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누군가 "어, 언니!"하며 현서양을 톡톡 쳤다. 우산을 빌려줬던 그 초등학생이었다.
형도 : 동네라도 우연히 보는 게 참 어렵거든요. 아마 바로 알아봤다면 몇 날, 며칠을'언니 언제 또 만나나' 두리번거렸을 거예요(웃음).
현서 : 사실 서로 몇 층 사는지 몰라서 우산은 가지란 맘으로 빌려준 거였거든요. 근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혹시 몇 호 사세요?" 물어보는 거예요. 알려주니까 "그때 우산 빌려주셔서 감사했어요"하고 인사하며 가더라고요.
형도 : 기분이 어땠나요. 물론 좋았겠지만요.
현서 : 그날 기분이 좀, 되게 좋은 거예요. 학교 가서 친구들한테 막 자랑도 하고요. "우산 빌려준 되게 귀엽게 생긴 애가 와서, 고맙다고 해줬어" 그런 얘기도 했지요.
아침밥을 먹고 겨우 기운을 조금 차렸을 때였다. 바깥에 택배를 받으러 현관문을 열었다. 거기에, 우산과 손편지와 작은 사탕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편지봉투를 뜯기 아까울만큼 스티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형도 : 우산을 빌려준 마음도 다정하지만, 그걸 잊지 않고 고마움을 표하는 것도 귀한 마음인 걸요. 편지엔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을까요.
현서 : '언니, 언니도 우산 필요한데 나한테 빌려줘서 고마워요. 언니는 얼굴도 예쁜데 마음이 더 예쁜 것 같아요.' 동글동글한 글씨로 그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형도 : 와, 기분이 너무 좋았겠는데요(웃음).
현서 : 그날 지독한 감기에 걸려 누워만 있었는데, 맘이 몽글몽글해지는 거예요. 저보다 아이 마음씨가 더 예쁜 것 같았어요. 그냥 잊어버릴 법도 하잖아요. 근데 그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 썼을 생각하니까 너무 귀여웠어요.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형도 :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우산을 빌려주는 일부터 시작한 다정한 마음 교환이랄까, 그런 따스함인데요.
현서 : 괜한 오지랖이 아니었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 이후에도 당분간은 맘이 따뜻하더라고요.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제 주변에 있을 때, 용기내어서 도와주면 되겠다 싶었지요.
형도 : 속상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못 믿는 세상이잖아요. 모른척하면 그만이고요.
현서 : 안 좋은 뉴스가 많고, 이웃 사이는 단절됐잖아요. 이제 고등학교 올라가는데 고민이 많이 들더라고요. 층간소음이나 주차 공간 때문에 싸우는 게 많이 들려오고요. 한 발씩만 물러서면 좋겠다 생각했었어요. 안타깝더라고요.
형도 : 그러나 어쩔 수 없으니까…조심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러운 걸텐데요.
현서 : 부모님도 걱정하시면서 "접촉을 줄여라" 말씀하시긴 했어요.
형도 : 그런데도 여전히 곁의 누군가와 연결되려는, 도움이 되려는 마음을 갖고 사는 거고요.
현서 : 모두가 그런 건 아니잖아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그정도 사리분별은 그래도 중학생이면 할 수 있으니까요. 당장 도움이 필요할 땐 도와주고요. 그정도는 베풀면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형도 : 현서양이 우산 빌려준 그 일을, 커뮤니티에 올린 것도 그런 맥락이겠어요.
현서 : 맞아요. 따뜻한 글이 올라오는 걸 많이 봤었어요. 그걸 볼 때마다 저도 따뜻해지고 본받아야지,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저도 쓰면 다른 사람들이 읽고 저처럼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었지요.
형도 : 도움을 준 일이 또 있을 것 같아요. 얘기해줄 수 있을까요.
현서 : 마을에 도서관이 있는데요. 제가 사실 오늘 생일인데(웃음), 생일 때마다 기부를 해요.
형도 : 생일 축하해요! 그런데 도서관에 기부를 해요? 언제부터요?
현서 : 8년 됐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용돈 기입장 쓰는 걸 배웠었는데요. 선생님께서 용돈 아껴서 기부를 해봐라, 그랬었거든요.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반년 정도 용돈 기입장을 써서, 돈을 모았어요. 뭐 살 일 있으면 안 사거나 아끼고, 고민하면서요.
형도 : 진짜 멋지네요. 기부할 곳이 많았을텐데, 책이었던 이유는 뭘까요.
현서 : 저도 초등학교 때 마을 도서관을 많이 갔는데요. 책을 되게 좋아해서 연체를 몇 번 할 정도로 많이 읽었거든요. 그런데 책은 계속 발간되는데 재밌는 책이 많이 들어오진 않았었어요. 그래서 10만원에서 10만원 중후반대로 계속 기부하고 있지요.
형도 : 그 책을 누군가 읽는 걸 보면 엄청 뿌듯하겠는데요.
현서 : 기부한 책에 제 이름이 쓰여 있는데요. 기분이 좋아져요. 손 때가 묻어 있으면 읽은 친구가 있구나 싶어 뿌듯하고요. 그래서 내년에도 해볼까, 그러던 게 벌써 8년이나 됐어요.
형도 : 진짜 궁금한 건데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이렇게 훌륭한 마음을 가지는 데에 영향을 준 사람이나 책이나 무언가 있을까요.
현서 :저희 어머니가 저보다도 더, 힘든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는 분이에요. 길가다 취객 있으면 도와주고, 은행에서 헷갈려하는 어르신들 나서서 도와주시고요. 그땐 엄마가 너무 오지랖인가 생각했는데요. 엄마도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었는데, 그땐 도와준 사람들에게 고맙더라고요.
자신보다 작은 아이가 비를 맞지 않도록 자기 우산을 내어주는 사람다운 사람. 생일마다 선물처럼 누군가를 위해 책을 기부하는 현서양. 그의 꿈은 '영화 감독'이란다. 영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느냐고 물었다. 잘 달리다가도 지칠 때가 있는데, 영화를 보며 사소한 행복을 느꼈음 싶다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또 내일을 살 이유가 될 수 있으므로. 그 역시 선한 마음이었다.
끝으로 현서양은 고마운 초등학생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고 했다.
"우산을 다시 돌려줘서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나중에 커서 보는 날도 있을 거예요. 그때 오지랖이라 생각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줬으면 좋겠어요. 저를 떠올리면서요. 도움의 손길도 그리 계속 이어졌음 싶어요."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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