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의 풀무질] 이중국적은 있는데, 이중주소는 왜 없나
[전범선의 풀무질]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얼마 전 의도치 않게 귀촌에 실패한 청년이 되었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로 전입신고한 지 1년 만에 다시 서울시 용산구 용산2가동 해방촌으로 주소를 옮긴 것이다. 사실 좀 억울하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나는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소 보금자리를 만들고자 인제로 갔다. 인천의 한 불법 목장에서 구조된 다섯 소의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인제군청과 지역주민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연이 닿은 신월리 ‘달뜨는마을’은 50가구도 안 되고 주민 대부분 70대 이상인 전형적인 인구소멸 위험지역이다.
나는 어르신들께 약속드렸다. 소들을 살려주시면 마을을 살려보겠습니다. 소 다섯이 이주해 오면 정주인구 50명, 관계인구 500명이 따라올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마을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선순환을 이룰 것입니다. 청년들의 패기를 갸륵히 여겨주신 주민들이 흔쾌히 승낙했고, 우리는 폐교인 신월분교에 보금자리를 지었다. 들꽃과 들풀의 이름을 따서 ‘꽃풀소’라고 부르는 홀스타인 얼룩소 다섯(머위, 부들, 창포, 엉이, 메밀)이 2022년 10월 이사 왔다. 꽃풀소 돌보미 가족 4명과 나를 비롯한 동물해방물결 활동가 4명이 폐교로 전입신고했다. 신월리는 단숨에 인구 8명이 늘어나는 쾌거를 이루었다.
‘달뜨는보금자리’ 건립을 위해서 2천여명이 후원했다. 주로 동물권을 지지하는 비건 청년들이다. 그들은 이미 신월리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관계인구다. 정기적으로 보금자리 소식을 구독하고, 봉사활동을 오기도 한다. 하지만 신월리에는 빈집이 없어서 아직 돌보미 가족 말고는 이사 온 사람은 없다. 필요하면 마을 체험관에 임시로 묵는데, 내년 가을 폐교 부지에 청년임대주택이 완공될 예정이다. 그때는 서울에서 4일, 신월리에서 3일 지내는 4도 3촌의 이상적인 삶의 균형을 찾으려 했다.
사실 청년이 아예 귀촌해서 살기란 쉽지 않다. 은퇴자는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와 정주인구가 될 수 있지만, 청년을 지방에 유치하려면 관계인구로 유도해야 한다. 삶과 일의 균형을 좇거나 생태 공동체를 찾는 예술가, 자영업자, 프리랜서, 디지털 노마드 등이 서울을 떠나고 싶어 한다. 나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아예 떠날 수는 없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다. 그래서 4도 3촌, 5도 2촌을 꿈꾸는 청년들이 많다.
그런데 왜 나는 다시 서울로 주소를 옮겼는가? 예비군 때문이다. 남면 예비군 중대에는 인원이 별로 없다. 작계훈련 통지를 받고 면사무소에 갔더니, 나 포함 4명이 있었다. 아직 인제에 집이 없다 보니 예비군 훈련 때문에 인제를 찾는 게 버거웠고, 그래서 매번 연기했고, 그때마다 중대장님이 전화를 걸어 호소했다. 그냥 서울에서 훈련받는 게 낫지 않냐고. 3차까지 연기하고 민망해 하는 수 없이 용산구로 다시 주소를 옮겼다. 강원도민에서 다시 서울시민이 되자 꽤 아쉬웠다. 춘천 출신인 나는 아무래도 강원도 사람이고 싶다. 일종의 귀소본능이랄까.
이중국적은 되는데 왜 이중주소는 안 될까? 서울에 살면서도 강원도 사람일 수는 없을까? 지방소멸을 막으려면 반드시 청년인구를 유치해야 한다. 그런데 청년은 정주인구보다는 관계인구일 수밖에 없다. 4도 3촌, 수도권과 지방을 오가는 삶을 장려해야 한다. 지자체로서는 행정상 주소지가 중요하다. 인구에 따라 지방세수와 중앙정부 보조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명 한명이 소중하다. 내가 서울로 다시 주소를 옮겼을 때도 우리 마을 사무장님이 참 아쉬워했다. 한국인인 동시에 미국인일 수 있듯이 서울 주민인 동시에 인제 주민일 수는 없을까. 지방세는 균등배분하고, 투표권과 피선거권 등 주민권도 인정하면 되지 않나.
대한민국이 직면한 인구 소멸과 지방 소멸 문제의 원인은 결국 하나다. 청년들의 삶이 각박하기 때문이다. 살맛이 나야 가정도 꾸리고 자식도 생각한다. 당장 내가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나라 걱정, 미래 걱정인가. 숨 쉴 틈, 발 디딜 틈이 없다. 틈은 지방에 있다.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인 대도시 라이프스타일을 4도 3촌의 균형 잡힌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고향사랑기부제도 좋지만 이 역시 중장년층 위주의 정책이다. 청년들이 지역과 뿌리 깊은 관계를 맺고 자유롭게 오가려면 그에 맞는 제도가 필요하다. 이중주소제가 기본이다. 나의 절반은 강원도민이라는 사실을 대한민국이 인정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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