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본말(本末)과 시종(始終), 그리고 선후(先後)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꽃도 예쁘고 열매도 많이 열리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니 내가 되고 바다에 이르게 된다.' <용비어천가> 2장에 나오는 글이다. 꽃이 예쁘고 열매가 많이 열리려면 나무의 뿌리가 깊어야 하고, 냇물이 되고 바다에 이르는 먼 여정을 가려면 샘이 깊어야 한다는 간단한 논리지만 우리 삶에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질문이다. 유교(Confucianism)의 핵심 가치는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asics).'이다. 가정이 화목하면 사회와 국가가 평안해지고, 내면의 충실하면 외면에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이 유교가 세상을 보는 눈이다. 기본이 무너지고 말단이 횡행하는 시대, 우선이 생략되고 결과만 중시되는 세태, 초심을 잃고 결론에 묶여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처음, 근본, 그리고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대형 로펌 출신 현직 변호사가 부인을 둔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고, 자신의 아이를 아파트 15층에서 내 던진 비정한 엄마에 대한 최근 뉴스를 보며 기본이 무너진 이 시대를 한탄하게 된다. 법률 지식 공부를 하기 전에 배려와 존중의 기본을 배웠어야 했고, 엄마가 되기 전에 자식 사랑의 기본을 익혔어야 했다. 기본과 근본이 제대로 서지 않고는 어떤 지식과 자격도 의미가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학생들의 성적과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인성과 인격의 근본은 여전히 의문이고, 기업의 가치와 매출액은 성장했지만 기업의 윤리와 사회적 기여도 함께 성장하고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뿌리가 약하고, 샘이 얕으면 가벼운 바람에 열매는 떨어지고, 짧은 가뭄에 물은 금방 말라버린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 풍요로움이 위태롭다면 기본을 건너뛰고, 초심을 잃고,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린 결과가 아닌지 질문해보아야 한다.
'아무리 예쁜 미소와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여인이라도 내면의 아름다움이 없다면 꾸며낸 허상일 뿐이다. 그림(繪, 회)을 그리려면 하얀(素, 소) 도화지를 준비해야 하듯이, 성숙한 인간이 되려면 기본(忠, 충)이 충실해야 한다.' 공자가 그의 제자들과 문학 수업을 하면서 한 말이다. 학력과 지위는 갖췄지만, 내면의 인성은 바닥인 사람, 보기엔 행복한 인생이지만 실제는 빈껍데기 인생,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썩은 기업, 말로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지만 내심은 권력 유지에만 몰두하고 있는 정치인, 국가의 부는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고 하지만 존중과 배려의 기본이 허약한 사회는 그야말로 약한 바람에 흔들리고, 작은 가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대상들이다.
근본(本)이 제대로 서면(立) 새로운 길(道)이 열린다(生)고 한다. 물건이 안 팔린다고 고민하기 전에 품질을 먼저 고민하고, 지지율이 안 오른다고 고민하기 전에 유권자를 위한 진정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기본이 튼튼하고, 본질이 아름답고, 내면이 충실하면 지지와 존경과 칭찬은 저절로 오게 된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고민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를 돌아봐야 할 이유다.
(대학大學)에 일의 시작과 끝, 사물의 본말, 일의 선후에 대한 구절이 나온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物有本末, 물유본말)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事有終始, 사유종시). 무엇이 우선인지를 안다면(知所先後, 지소선후) 도에 가까울 것이다(則近道矣. 즉근도의).'
정치는 민생이 근본이고 당쟁은 말단이다. 교육은 인성이 우선이고 지식은 다음이다. 가정은 화목이 처음이고 부귀는 나중이다. 인생은 행복이 우선이고 출세는 나중이다. 근본이 혼란한데(本亂, 본란) 말단이 제대로 되는 경우(末治, 말치)는 없다. 한 해를 보내면서 본말(本末), 시종(始終), 선후(先後)가 제대로 내 인생에서 작동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기본으로 돌아가서 초심을 생각하며 다시 시작하면 길은 저절로 열린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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