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탈냉전 막는 거대한 분단과 한반도 [책&생각]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
이삼성 지음 l 한길사 l 3만8000원
최근 몇 년 새 국내 학계와 출판계에서 도드라진 흐름 중 하나가 ‘동아시아 담론’이 부쩍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 문화인류학, 문학, 경제, 스포츠까지 연구 분야도 방대하고 촘촘하다. 동아시아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 몽골까지 포함한 지리적 개념이자, 북미·서유럽과 함께 국제 정치와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국가군이다.
정치학자 이삼성 한림대 명예교수의 신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태평양 전쟁 이후 동아시아 질서가 생성된 구조적 요인과 작동 방식을 ‘대분단’이라는 틀로 설명한 책이다. 지은이가 2003년 논문에서 ‘동아시아 대분단’이란 개념을 처음 도입한 때부터 최근까지 20년에 걸친 연구 성과를 17편의 논문으로 추려 엮은 지적 오디세이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는 중국 대륙과 미·일 동맹의 대립인 ‘대분단의 기축’과, 중국·대만과 한반도 분단이라는 하위층의 소분단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체제를 뜻한다. 중국 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패배한 뒤 옮겨간 대만, 일본의 패전 뒤 미국의 군사기지로 전락한 일본 오키나와 섬, 그리고 미소 양대 강국이 분할 점령했던 한반도를 잇는 가상의 접경을 사이에 둔 거대한 분단과 대립이다.
대분단이 국제 역학이 갈라놓은 지정학적 단층선이라면, 소분단은 냉전 대립과 민족분단이라는 이질적 요인이 착종돼 서로가 서로를 유지·강화하는 구조다. ‘대분단체제’ 개념은 이 같은 전후 동아시아 질서 특유의 동태적이고 유기적인 연관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지은이가 ‘동아시아 대분단’이란 개념을 처음 쓴 것은 2003년 논문에서다. 이때는 동아시아 대분단의 상태를 ‘구조(structure)’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는 “그 스케일에 어울리는(…) 구조적 체계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개념인 ‘체제(system)’로 명명하고 이론을 더 단단히 다져왔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대분단’이 왜 ‘체제(system)’인가? 첫째, 대분단의 기축과 민족분단들이 서로를 유지하는 패턴을 보인다는 점, 둘째,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 역사심리적 간극이라는 세 가지가 상호 지탱하고 보완하는 관계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게 지은이의 설명이다.
대분단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중국과 일본 제국의 특수성을 알아야 한다. 19~20세기 ‘탈아입구’를 지향했던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의 경로를 따랐다. 반면 강대국이던 중국은 청조 말에 서구와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가 내전을 겪고 공산주의 혁명을 거쳐 신중국으로 거듭났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과 미국의 원폭 투하(1945)라는 사건의 강렬한 이미지는 근대 100년에 걸친 미국과 일본의 끈끈한 동맹 관계를 가리는 인지적 착각을 낳는다. 그러나 두 나라는 ‘중국 경영’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도 갈등과 적응, 협력을 지속했다. 미국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도 진주만 기습 직전까지 일본에 폐철과 항공폭탄(1938년까지), 항공유(1940년까지), 석유(1941년까지)를 수출했다.
종전 뒤에도 패전국이자 전범국 일본은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미소 냉전체제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으로 재편입됐다. “그것은 대륙과 일본 사이에 역사심리적 간극을 응결”시켰고, 그 간극이 “대륙 봉쇄를 통한 동아시아의 분열에 기초한 미국의 패권 전략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대분단은 미일동맹체제와 아시아 대륙 사이의 분단이기도 하다.
유럽에선 1991년 옛소련의 급작스럽고 일방적인 붕괴로 냉전 체제가 막을 내리면서 동서 분열이 해소됐고 이후 범유럽 통합 운동의 계기가 됐다. 이와 달리 동아시아에선 냉전의 그림자가 걷히기는커녕 새로운 국면으로 지속되고 악화일로를 걸었다. 탈냉전 이후 한국과 대만, 필리핀의 정치적 민주화도 중국의 지속적인 권위주의 체제와 대조되면서 대분단 체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보강”했다. 특히 한반도는 그 분단선의 한복판이자 경계에 있다. 지은이가 전후 동아시아 질서는 ‘냉전/탈냉전’이라는 상투적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통시적 연속성”에 있다고 보고 대안적 개념을 천착해온 것도 이런 특수성에 주목해서다.
지은이는 이 책에 “현실주의적 관찰과 독해”뿐 아니라 “다분히 이상주의적인 비전과 꿈”도 함께 담았다. 일례로, 2007년 논문에선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해 대만-오키나와-제주도를 잇는 ‘동아시아 평화 벨트’를 제언했다. 대만이 “민주적 정체성을 지닌 미래 중국과의 평화적 통합”을 전제로 미·중 패권경쟁에서 자유로워지고, 오키나와가 비군사화되며, 제주도가 군사화의 위기를 극복하고 동아시아 평화의 섬으로 정착하는 것이다. 명확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지리적 형상화를 매개로 평화 벨트를 상상하는 것은 여러 가능한 실마리 찾기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은 그 핵심이다. 지은이는 “21세기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일정한 균형자 역할에 필요한 기본 군사력 구축과, 당장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한 군비 통제 사이의 균형이라는 신중한 지혜”를 강조한다. 이상을 현실로 바꾸는 것은 당사국들의 정치적 상상력과 합의, 신뢰를 쌓아가는 이행에 달렸을 테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김건희 여사가 대통령인가 [아침햇발]
- [속보] ‘돈봉투 의혹’ 송영길 검찰 출석…“진술 거부할 것”
- ‘킬러’ 없앤다더니 역대급 불수능…사교육 더 부추길 판
- 12월인데 ‘봄날씨’…토요일 낮 전국 대부분 15도 이상
- ‘식물 광합성’ 사람 쉬는 주말에 64% 더 활발해지는 이유
- ‘돈 부른다’ 속설에 은행마다 달력 대란…중고플랫폼 사고팔고
- [Q&A] 어린이한테 급증 ‘미코플라스마’…항생제도 무용지물?
- 서울청도 ‘이태원 정보보고서’ 삭제…검, 증거인멸 추가 기소 검토
- [단독] AI 통화녹음 도청일까…정부 ‘SKT 에이닷’ 점검 나선다
- 중대재해 인식 깨운 김용균…정작 그 비극을 벌하지 못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