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바람이 좋아서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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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가면 꼭 들르는 음식점이 있다.
'장대'로 불리는 제주 양태에 무채를 넣고 심심하게 끓인 장대국을 하는 집이다.
육지에서와 달리 제주에서는 양태로 국을 끓여 먹는다.
지난주 일요일 오후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제주시외버스터미널 옆 각재기국집에 전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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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가면 꼭 들르는 음식점이 있다. ‘장대’로 불리는 제주 양태에 무채를 넣고 심심하게 끓인 장대국을 하는 집이다. 육지에서와 달리 제주에서는 양태로 국을 끓여 먹는다. 이 집은 멜국(멸치국)·각재기국(전갱이국)도 맛나고 밑반찬도 푸짐하다.
그런데 이 식당은 일요일에는 쉰다. 평일에도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브레이크 타임(쉬는 시간)이 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 집을 찾았다가 발걸음을 돌린 적 있었다. 평일에 갔다가 브레이크 타임에 걸린 적도 있다.
이 식당은 약과다. 제주에는 브레이크 타임이 아니라 아예 오후 3시까지만 영업하는 곳도 많다. 서울의 식당처럼 저녁에도 문을 열 것으로 생각했다가는 낭패를 본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요령도 생긴다. 지난주 일요일 오후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제주시외버스터미널 옆 각재기국집에 전화를 했다. 이 집은 평일이나 휴일이나 오후 3시면 문을 닫는다. 그래서 전화로 “오후 2시50분쯤 식당에 도착할 듯한데 각재기국을 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된다고 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가보니 식당에는 우리 말고도 세팀이 있어 오후 3시가 지나도 각재기국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등 푸른 생선인 전갱이에 우거지를 넣고 끓인 각재기국은 서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제주 음식이다.
이처럼 제주 식당의 영업시간은 대도시의 식당과 사뭇 다르다. 주민을 상대로 하는 식당은 휴일에도 쉬고 저녁 영업도 하지 않는다. 저녁 영업을 해도 오후 7시면 문을 닫고 아예 술도 팔지 않는다. 심하면 주말뿐 아니라 월·화요일까지 연달아 쉰다. 지금 기업 등에서 도입이 거론되는 주 4일 근무제와 반일 근무제를 제주에서는 일찌감치 해온 셈이다. 경쟁과 효율의 관점에 익숙한 서울 사람 눈에는 지나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심지어 주말 내내 기다렸다가 주중 영업일에 어렵게 찾았지만 문을 닫은 가게도 있다. 문 앞에는 ‘일이 있어 육지에 갑니다’처럼 나름 납득되는 쪽지가 붙어 있기도 하지만 ‘바람이 좋아 나갑니다’라는 서울 사람에게 문화적 충격을 주는 글귀가 붙어 있기도 했다.
이런 여유가 무한 경쟁에 찌든 나에게는 신선하기만 하다. 제주에는 이런 식당뿐 아니라 도무지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은 곳에 있는 해변의 서점이나 숲속의 커피숍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장사가 될까’라는 걱정과 달리 늘 고객으로 북적이는 걸 보면 나처럼 이런 장소에 유혹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내 견해로 이런 식당과 서점의 마케팅 포인트는 ‘낯설게 보기’다. 공간이 낯선 만큼 시간도 낯설어진다. 정신없이 흐르던 시간이 제주의 이색 공간에서는 느슨하게 왜곡된다. ‘경쟁에 뒤처지면 끝’이라는 강박증을 쉽게 내려놓게 만드는 기분 좋은 왜곡이다. 바다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따뜻한 햇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제주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는 참 다르게 흐른다. 서울에서도 제주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지난주 일요일 오후 3시쯤 시원한 각재기 국물을 느긋하게 들이켜며 해봤던 생각이었다.
권은중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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