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고속道·고속鐵은 세계 최강, 보도블록은 세계 꼴찌?
보도블록 마감은 원래 고난도 ‘조각가의 정성’ 요구하는데 우리와 선진국은 30년 격차 혹평
‘걷기 좋은 길’은 상식인데 고속철, 고속도만 좋으면 뭐하나
사랑의 온도탑, 구세군 자선냄비, 크리스마스 장식과 조명, 군밤·군고구마 노상 매대 등 각종 세모 풍경이 거리마다 설렌다. 하지만 결코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연말 풍물도 하나 있다. 보도블록 교체 공사다. 멀쩡해 보이는 길이 졸지에 공사판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실제 국토교통부의 공공공사 발주는 연말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회계연도 독립의 원칙에 따라 세출예산을 해당 연도 내에 모두 집행코자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도블록 교체공사는 사업비 구조가 단순하고 시각적 변화 효과도 커 지자체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이러한 연말 보도 교체 공사는 오랫동안 민원(民怨)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십수 년 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은 ‘보도블록 시장’을 자임하며 ‘보도블록 십계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예산 낭비를 줄이고 부실공사를 막겠다는 취지였는데, 그중 하나로 ‘보도공사 closing 11′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관용구’(官用句)를 창안하기도 했다. 모든 공사를 11월까지 마치겠다는 약속이었다. 연말 직전 예산 소진이라는 세간의 인상을 묽게 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이후에도 일반 시민이 체감하기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사실 보도블록 교체 공사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해야 한다. 상하수도나 통신선로 같은 지하 지장물(支障物) 설치, 공중선(空中線) 매설, 신규 건축물 인입 등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파헤쳐지고 메꾸어지는 것은 보도의 태생적 숙명이다.
보도블록 공사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이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보도 이용 환경이 전반적으로 너무나 불편하고 추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보다 부실시공의 결과로서, 깨지거나 비뚤어지고 꺼지거나 망가진 보도블록이 주변에 지천으로 많다. 가로등, 신호등, 환풍구, 가로수, 소화전, 우체통, 맨홀 등 수많은 시설물이 지면에 돌출되어 있어서 보도블록 마감 시공은 ‘조각가의 정성’을 요구한다는데, 이 분야에 관한 한 우리와 선진국 사이의 기 술격차는 30년 이상이라는 평가다(박대근,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속도로나 고속철도, 국제공항을 자랑하는 나라가 보도블록 하나 제대로 못 깔거나 안 까는 것이다.
시민의식이나 정치문화의 책임도 크다. 가게들이 공용 인도를 무단 침범하는 경우가 예사일 뿐 아니라 불법 광고물에 의한 통행 방해 또한 다반사다. 보도 위 불법 주정차 행위가 볼라드(차량 진입 억제용 말뚝)를 훼손하면서까지 만연되어 있지만, 지자체의 단속은 있으나 마나다. 선거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볼라드의 실제 효능도 애매할 때가 많다. 이처럼 우리나라 보도에는 지뢰나 암초, 복병(伏兵)이 도처에 숨어있다. 도로 관련 정책을 관장하는 고관대작들이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혹은 유모차를 밀며 이런 동네 길을 한 번이라도 직접 걸어봤을까?
지난 10월 서울시는 ‘서울관광인프라 종합계획’ 세부안을 발표했다. 서촌이나 익선동 등 도심 관광지 보행로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목표가 포함되어 있는데, 환기구나 전봇대, 공중전화 부스 등 시설물의 위치 조정 혹은 지중화(地中化), 흡연 부스 및 쓰레기통 설치 등이 주요 사업 내용이다. 서울시가 보행 환경 쪽에 관심을 늘린 것은 물론 반갑다. 하지만 그것이 외국인 대상 관광 인프라 증진 차원에서 논의된 사실은 적잖이 아쉽다. 이른바 ‘걷기 좋은 도시’의 혜택과 매력은 일반 시민이 먼저 누려야 하는 것 아닌가? 최근 시내 곳곳에 다양한 명목의 ‘보행특화거리’를 조성하려는 노력에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사람 다니라고 만든 길이 걷기에 편해지는 것은 상식이나 원칙일 뿐, 새삼 특별히 강조할 사안은 아니지 않을까?
보행 환경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누는 척도 가운데 하나다. 선진국의 경우 보도블록 공사에서도 장인정신(匠人精神)은 어김없이 발휘된다. 토목에 예술을 가미하는 서구 건축문화의 전통인 셈인데, 말하자면 ‘신(神)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details)고 믿는 직업적 소명의식의 승리다. 그 결과, 대부분 동네 길은 인프라와 어메니티(amenity, 쾌적한 장소감)를 자연스레 겸한다. 더군다나 지금은 ‘보행일상권’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다. 코로나 펜데믹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15분 도시’ 개념은 장보기나 외식, 학원 다니기나 병원 이용, 취미나 여가 생활과 같은 일상적 소비활동은 가급적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범위를 넘지 말자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걷기 나쁜 도시’는 목전의 고충이나 남부끄러운 차원을 넘어 보행친화적 미래 도시를 대비하는 측면에서도 더 이상은 이대로 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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