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계묘년 저물 무렵의 논어 공부

기자 2023. 12. 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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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에너지 회사 대표로 취임한 친구에게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써서 축하난을 보냈다. 리본이야 난초의 잎처럼 자라지는 않겠지만 호학하는 경영인의 공부는 더욱더 그윽한 경지로 나아가리라. 그제 형님댁에서 텃밭의 무와 배추를 가져가라는 전갈을 받았다. 아파트 차단기 앞에서 호출화면을 누르는데 자투리에 조야한 광고 대신 이런 구절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 배우고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축의금이 필요해서 현금자동입출금기에 갔더니 시각장애인에 대한 안내가 나왔다. 대부분 급한 마음에 이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만, 이럴 때 논어의 한 대목으로 연결되고 입출금기에 부착된 점자도 한번 쓰다듬는다. “공자께서는 (…) 맹인을 보실 때는 비록 그들이 젊더라도 반드시 일어났으며, 그들 앞을 지날 때는 빠른 걸음으로써 경의를 표하였다.”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특출한 이단아를 꼽는다면 단연 이탁오(李贄·1527~1602)일 것이다. 그의 논어에 대한 평은 두루뭉술하거나 애매함이 없다. 거침없이 내지르는 삐딱한 해석은 망외의 생각을 가져다준다. 이탁오의 <논어평>을 저본으로 삼고 유교와 불교의 회통을 사유한 <논어, 천년의 만남>(이영호 편역)을 출간한 건 올해의 수확이다.

제주도 꽃산행. 여관 창문을 두드리는 새벽 세찬 비에 놀라 깨었다. 이 낭패를 어찌하나. 문득 마음먹길, 저 빗줄기를 논어의 한 문장으로 맞바꾸면 어떨까. “유(儒)는 수(需)자에서 온 것이며 비가 오기를 비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파생되어 술사를 가리키게 되었다”(공자의 철학, 채인후)고도 하니 전혀 맥락이 없는 바는 아니겠다. 그 이후 비 오면 논어 생각, 비 안 오면 그래서 논어 생각.

“또 쌓이면서 아찔해지는 한 해. 뭔가 허전한 여유가 생기는 12월. 이즈음 파주 하늘은 그 어디로 떠나려는 철새들의 행렬로 공중이 북적거린다. 고개에 장착한 피리를 힘줄이 드러나도록 힘껏 부는 새들의 생생한 울음. 논어의 ‘조지장사 기명야애(鳥之將死 其鳴也哀·새가 죽으려 할 때 그 울음이 구슬픔)’와 정확히 맞물린다. 그리고 심학산에 올라 멀리 김포평야를 바라보면, 내년을 기약하며 깊은 호흡에 빠진 논에는 착한 기러기 이삭 주우며 쉬어가고 있는 듯.”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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