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리 수용해 중화주의 탈피… 日도쿠가와 지식인들[박훈 한국인이 본 일본사]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입력 2023. 12. 7. 23:33 수정 2023. 12. 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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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국 조선의 특성이나 전통이 아니라 우주, 사회, 인간을 떠받치고 있는 보편 원리였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유지되고 있는 보편문명(중화문명)에 있었다. 그러니 이황, 이이나 송시열에게서 제대로 된 ‘조선론’을 볼 수 없는 것도, 19세기 말 소개된 민족주의를 낯설어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일본은 사정이 좀 달랐다. 그들은 일찌감치 국제 관계 속의 ‘자국일본’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했다.》


비주류 머문 일본의 중화론자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성리학자이자 중화론자인 후지와라 세이카. 조선과 달리 이 같은 중화론자들은 일본 지식계에서 끝내 주류가 되지 못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도쿠가와 시대에 들어서자 일본에도 유학이 퍼지면서 중화론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국일본보다는 성신(誠信), 혹은 안민(安民) 같은 유학적 덕목이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의 성리학자 강항(姜沆)에게 일본의 성리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는 말한다. “일본인민이 곤궁한 것이 지금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만약 조선이 명나라와 함께 인민을 이 물불 같은 고통에서 구할 것을 표방하며 군대를 파견하고, 조금이라도 인민의 이익을 침범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쉽사리 도호쿠 변경인 시라카와관(白河關)까지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본인이 조선에서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살인, 약탈 행위를 한다면 쓰시마(對馬)조차도 취할 수 없을 것이다.”(강항 ‘간양록’) 여기서는 자국, 타국이라는 의식을 넘어 ‘보통 사람들의 편안함과 이익’이라는, 보편적 관점이 도도하게 설파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지식계에서 이런 관점은 끝내 주류가 되지 못했다. 많은 지식인들은 국가라는 단위를 중시하고, 일본을 그저 자기 나라라는 이유로 추켜세우려는 경향이 확산되었다.(박훈 ‘18세기 말∼19세기 초 일본에서의 ‘戰國’적 세계관과 해외팽창론’) 야마가 소코(山鹿素行)는 사람들이 “일본은 소국이기 때문에 중국에는 모든 것이 미치지 못하고, 성인도 중국에만 출현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들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고금의 학자가 모두 그렇게 생각하여 중국을 흠모하고 배워 왔다. 근자에 처음으로 이 생각이 잘못임을 알았다.”(山鹿素行 ‘配所殘筆’)라며 지식계의 중국 숭배를 비판하고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일본이 중국보다 우월하다고 제시한 이유가 흥미롭다. 중국은 국경이 오랑캐들과 접하고 있어 방위가 곤란하고, 그 때문에 만리장성 건설 노역 같은 것으로 백성을 괴롭히고 있는 점,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점,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을 갖고 있는 일본과 달리 정치적 변동이 잦은 점 등이다. 즉, 군사적 우월성, 황통의 안정성 등을 그 이유로 삼고 있는데, 이것들은 앞에서 본 후지와라의 성신·안민 같은 가치 기준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었다.

일본 자국 이익이 우선

18세기 말 일본인과 중국인, 유럽인의 교류를 그린 그림. 위키원드
더욱이 도쿠가와 시대 제일의 성리학자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에 이르면 그 변화는 뚜렷해진다. 어느 날 중화문명을 열심히 설파하는 야마자키에게 제자들이, 만일 그토록 훌륭한 중화의 성인들이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야마자키는 “중국이 일본을 무력으로 복속시키려고 한다면, 요순문무(堯舜文武)가 대장이 되어 온다고 하더라도 석화시(石火矢)로 깨부수는 것이 대의다. 예의덕화(禮義德化)로 복종시키려 해도 신하가 되지 않는 것이 옳다. 이것이 춘추(春秋)의 도다.”(淺見炯齋 ‘靖獻遺言講義’ 卷7)라고 대답했다. 당연한 얘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는 우리 선조들도 있었다. ‘황사영백서’에서 보듯이, 조선 천주교도들은 서양 군함들이 들이닥쳐 신앙을 퍼뜨려줄 것(예의덕화)을 바랐고,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조선의 전제정부에 대해 일본이 군사 행동을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세계지도 보며 일본 위치 직시

니시카와 조켄이 쓴 ‘증보화이통상고’에 수록된 세계지도. 이 책에는 5대주라는 지리 개념과 전 세계 129개국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일본은 17세기부터 유럽과 교류를 통해 세계 지리 지식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중국이 중심이라는 ‘중화주의’를 탈피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이 중국 중심주의를 탈피하는 데에는 당시 세계 지리 지식이 널리 보급된 것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니시카와 조켄(西川如見·1648∼1724)이 쓴 ‘화이통상고(華夷通商考·1695년)’와 ‘증보화이통상고(增補華夷通商考·1708년)’는 5대주라는 지리 개념을 소개하며, 무려 129개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후에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5)의 ‘채람이언(采覽異言)’(1713년)과 ‘서양기문(西洋紀聞)’, 데라지마 료안(寺島良安·1654?∼?)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繪·1713년)’,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의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1810년)’ 등이 간행되었다. 세계지도와 지구본도 널리 보급되어 일본인의 세계 지리에 대한 정보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일본인들은 지구본을 신기한 듯 빙글빙글 돌리면서 중국이 크고 중요한 나라이긴 하지만 세계의 중심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만세일계의 훌륭한 나라이긴 하지만, 지구본 위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마자키의 문하생 아시미 게이사이(淺見炯齋·1652∼1711)는 “무릇 하늘은 땅을 감싸고 땅은 하늘을 받들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각각 그 지역의 풍속이 미치는 곳은 각자 나름의 천하이니 존비귀천 같은 것은 없다”(‘中國弁’)며 국가 간의 대등성을 주장했고, 따라서 중국을 중화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거꾸로 일본을 중화라 하고 중국을 오랑캐라고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자국, 타국을 부를 때는 그저 오국(吾國), 이국(異國)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쿠가와 시대 일본 주류 지식인들의 국제관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나뉘어 존재한다는 만국병립론이었다. 당시 일본에 약 270개의 봉건국가가 병립해 있는 실정은 이런 이미지를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국 중에 일본은 얼마나 훌륭한 나라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논의도 등장했다. 19세기에 들어 안보위기 의식이 커지자 만국병립론은 만국대치론으로 급속히 바뀌어 갔다. 단순히 나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패권을 노리며 할거·대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불과(!) 200, 300년 전 자기 땅에서 실제로 전개되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1467∼1573년)를 떠올리게 했으며, 당시 지식인들은 실제로 이를 전국시대의 재래(再來)라고 파악했다. 잠재해 있던 일본의 선민의식은 이때부터 폭주하기 시작하는데, 국학(國學)과 미토학(水戶學)이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본 칼럼에 이미 쓴 바 있으니, 참조해주시기 바란다.(2023년 8월 18일자)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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