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현장 모르는 지도자의 습관적 패착

이남석 발행인 입력 2023. 12. 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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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45편
타산지석 삼아야 할 이순신 리더십
유비무환 자세로 전쟁 준비하고
창조적ㆍ혁신적 리더십 통해
전투에서 연거푸 승리 거둬
현장 모르는 선조와 대조적

날씨가 좀처럼 받쳐주지 않았다. 부산포로 향하던 조선 연합함대는 거친 날씨 탓에 번번이 바다에서 발이 묶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공격하라'는 지령만 내리고 있었다. 자고로 지도자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장에 걸맞지 않은 지시나 명령만 주야장천 하달해 지도자가 되레 '악당(빌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현장을 모르는 지도자는 민심을 얻을 수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견내량에 집결한 조선 수군은 2월 8일 칠천도로 이동해 머물고 9일 새벽에 부산포를 목적지로 삼아 출발하려 했다. 이때 폭우가 내리자 이순신은 칠천량과 가덕도에 진을 치고 왜군의 동태를 살폈다. 그 와중에 안골포 인근 웅천에 왜군이 성을 쌓고 포구인 웅포에 전진기지를 만들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웅포는 부산포로 향하는 길목이다. 따라서 이곳에 주둔한 왜군을 반드시 제거해야 안전하게 부산포로 진격할 수 있었다.

조선의 연합함대는 2월 10일 새벽 웅천 해역으로 출발했다. 웅포 포구 쪽에 도착하자 성벽ㆍ토굴ㆍ목책 등 각종 엄폐물로 방어선을 친 왜군은 조총과 대포로 대응했다. 이순신은 적을 큰 바다로 끌어내는 유인작전을 펼쳤으나 적은 이미 이 전술에 여러 당해봤던 터라 말려들지 않았다.

이날 조선 연합함대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영등포 뒤의 조진포로 이동해 정박했다. 다음날은 날씨가 나빠 수군을 쉬게 하면서 소진포에 머물렀다. 12일엔 두번째로 공격에 나섰지만 적이 전투를 회피하고 있어 할 수 없이 아군은 칠천도로 물러났다.

아군의 입장에서는 웅포의 지형이 좁은데다 거센 비바람 때문에 무리하게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적은 넓은 바다로 나올 생각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연합함대는 합동작전을 위한 훈련을 실시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7일에도 아군은 비바람 때문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는데 "도주하고 있는 적의 물길을 막고 몰살시켜라"라는 선조의 명령서가 도착했다. 다음날인 18일, 조선 연합함대는 다시 웅천 공격을 시도, 전투가 벌어지긴 했으나 결국 강풍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 무렵 육지에서는 선조와 류성룡 등을 크게 당황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한성 공격에 실패한 명나라 지원군 제독 이여송이 조선 조정의 반대에도 개성으로 퇴각했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수군 연합함대는 20일에도 웅천을 치려 했지만 이날도 강풍 때문에 일부 판옥선이 서로 부딪혀 깨지는 상황이 발생해 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자 순신은 육해군이 연합으로 백병전을 불사하는 상륙작전을 펼치기로 작정하고 경상도 순찰사 김성일에게 육군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육지 상황이 다급해 웅천 쪽으로 군대를 보내줄 수 없다"는 답신만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순신은 22일 네번째의 웅천 공격을 단행했다. 순신은 이날의 전투 상황을 「난중일기」에 자세히 기록했다.

"새벽부터 구름이 검더니 동풍이 세게 불었다. 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해 서둘러 출항,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바람이 멎은 듯해서 (함대를) 재촉해 웅천에 이르렀고 삼혜ㆍ의능 두 승장과 의병 성웅지를 제포(경남 진해시 웅천2동)로 보내 곧 상륙을 하는 척했다.

또 우도에 있는 여러 장수의 배들 중에 튼튼하지 않은 배들을 골라 동쪽으로 보냈다. 그들 또한 상륙하는 척하게 했더니 왜적들이 당황해 갈팡질팡했다. 이 틈을 타서 모든 배를 몰아 일시에 들어가자 적들의 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약해져 거의 섬멸했다. 그러나 발포 2척과 가리포 2척이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적에게 뛰어들었다가 그만 얕은 곳에서 좌초에 걸려 적에게 습격을 받았다.

참으로 분하고 분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 후 진도의 지휘선 1척도 적에게 포위돼 거의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우후가 곧장 달려가서 구해 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참으로 분하고 분하도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하랴. 이는 모두 경상우수사의 탓이다."

이순신은 지금의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다양한 리더십을 보여준 바 있다. 유비무환의 자세로 전쟁을 준비하고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리더십을 통해 거북선을 만들고 전투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다.

이날의 일기에서도 그가 지닌 '인간 중심 리더십'과 '윤리적 리더십'을 읽을 수 있다. 휘하 장졸의 안전에 늘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공정하지 않고 부도덕하고 교만한 행위를 배격했다. 그래서 존경과 신뢰를 받았고, 이는 군사의 사기 진작으로 이어졌다.

조선 연합함대는 그동안 이어진 4차례의 웅천 공격 이후 칠천량과 인근의 바다 위에 머물며 공격 기회를 엿보다 2월 28일과 3월 6일 두 차례에 걸쳐 적을 공략해 많은 적을 살상했다. 하지만 왜군은 계속 포구 깊숙이 도망쳐 대응하지 않는 바람에 더 이상의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3월 6일 이후 웅천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적이 해상으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아군이 무리한 공격은 자칫 연안 지역의 조선 백성들이 피해를 입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연합함대는 소강상태 기간 주로 한산도에 머물면서 전선 건조를 위한 목재 조달에 힘쓰는 한편 활쏘기 연습을 계속하면서 전투력 유지에 힘썼다. 웅천 전투의 소강상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육지에서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순신이 2차 웅천 공격에 나섰던 2월 12일, 전라감사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왜군 정예부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었다.

조선 연합함대는 웅천 전투에서 비바람 때문에 수차례 전진을 하지 못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당시 왜군은 한양으로 진입하려는 조ㆍ명연합군을 한양 인근의 벽제관에서 물리친 기세를 몰아 개성과 평양성을 다시 점령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마침 명나라의 조선 지원군 제독 이여송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의 쓴맛을 보고 도망친 상태였다. 왜군이 임진강을 건너 개성을 치기 위해서는 선결과제가 있었다.

바로 한양 부근에 남아 여러 곳에 진을 치고 있는 조선의 군사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권율이었다. 권율의 군사는 수원 독성禿城산성에 웅거했을 때부터 왜군이 이겨내지 못한 강적이었기 때문이다.

행주산성의 강적을 놔두고 임진강 이북으로 출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한양에 집결해 있던 왜군 장수들은 권율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목촌중자, 장곡천등오랑 대곡길계의 등 왜군의 여러 장수가 정예병 2만명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향해 쳐들어갔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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