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한국인] 맨해튼에 'K컬처 지도' 만들다 … 뉴요커 홀린 전직 삼성맨
"부자 중에 샤넬백 한 개만 사는 사람이 있나요. 맥주는 첫 잔이 가장 맛있지만 명품은 아예 안산다면 모를까 하나 산 사람은 열개 스무개 컬렉션을 채우려 하죠. 패션 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 등 문화적인 것들도 마찬가지에요. 일단 어떤 계층이 해당 문화를 스스로의 취향으로 받아들이면 그건 소비가 아니라 향유가 됩니다. 고급문화 향유에선 한계효용이 체감하지 않고 오히려 체증합니다. 한국 문화를 그렇게 만들어야죠."
김천수 뉴욕한국문화원장은 10개월간 공석이던 자리에 대한민국이 심혈을 기울여 투입한 문화 외교관이다. 삼성그룹 출신으로 제일기획 부사장과 CJ 라이브시티 대표를 지낸 그는 공무원이 아닌 민간에서 발탁돼 혁신의 기대를 모았다. 게다가 스스로도 더 경제적인 반대급부가 큰 오퍼를 뿌리치고 공직에 온 터여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컸던 것 같다.
올 초 부임한 직후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에 아직 아무런 성과가 없다며 한사코 응대를 사양하더니 딱 반년 만에 대형사고(?)를 쳤다. 뉴욕 맨해튼 거리를 가을부터 들썩이게 한 'It's Time for K-Culture.(지금은 한국 문화의 시간)'라는 이름의 플랫폼을 만들어낸 것이다.
실제로 K팝과 영화에 이어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드라마와 장편 시리즈 등이 히트하면서 이른바 미국 MZ세대(1980년생부터 1990년대 초중반생인 밀레니얼세대(M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생인 Z세대) 일부의 한국 호기심과 동경심은 산발적으로 커지던 찰나다.
김 원장은 "사실 뉴욕 맨해튼이란 도시 전체가 문화성지로 불리게 된 까닭은 메트로폴리탄이나 카네기홀 등 중심지의 대형공연장뿐 아니라 브루클린을 포함한 도시 주변 곳곳에 소규모 공연장이 상존하면서 조화로운 문화적 공생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며 "한국 문화도 BTS(방탄소년단)나 기생충 같은 대작으로 미국인들의 흥미를 초반에 이끌었다면 이제는 뉴욕의 주변부에서도 일상의 삶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스며들 문화적 스펙트럼을 소개할 때"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뉴욕커들은 한국의 서브컬처에도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 인디브랜드 패션이나 클래식 미술작품이 아닌 웹툰, 호러문학, 실험미술 등은 물론이고 80년대 이후 한국영화에 관한 전시와 공연이 맨해튼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이 때문에 뉴욕 한국문화원이 시작한 첫번째 작업은 올 하반기 맨해튼에서 즐길 수 있는 'K컬처 지도'를 만든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인 허은산 씨가 디자인한 앙증맞은 접이식 지도를 마련해 오프 라인은 물론이고 온라인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배포했다. 맨해튼 곳곳에서 열리는 한국 관련 공연과 전시 이벤트를 그림으로 표기해 뉴요커들이 좌표를 설정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할인티켓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해당 이벤트는 물론이고 맨해튼에 있는 한식당 대부분 끌어모아 5~30% 할인제공도 약속했다.
김천수 원장은 "이런 동시다발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의 물길을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흐르게 해줄 플랫폼이 필요했다"며 "전에는 한국이라는 오리진(Origin)을 밝히는 것이 자랑스럽지 못했지만 이제는 국가브랜드가 서브컬쳐와 만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시기이기에 확신을 갖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행은 고역이었다. 김 원장을 포함해 고작 10명 정도인 문화원 인력이 각 공연이나 전시뿐 아니라 한식당 한 곳 한 곳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해 할인행사를 기획한 것은 그야말로 중노동에 가까웠다.
김 원장은 "초반 한 두달 만 설명 작업이 좀 까다로웠고 이후 한인사회에 소문이 퍼지자 식당은 물론이고 미용실이나 찜질방 등 한국식 웰니스 업체까지 좋은 취지에 공감해 동참을 원하면서 오히려 문화원에 감사인사를 전해왔다"며 "뉴욕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은 한인 상인들은 장사에 실익이 있건 없건 지금이야말로 한국적인 문화에 긍지를 가지고 국격을 올릴 때라고 했다"고 전했다.
일루전 아티스트인 윤다인 씨도 릴스를 만들었는데 이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아예 자사의 계정에 포스팅해 270만 팔로워가 보게 만들었다. 이런 '한국의 시간'에는 뉴욕시 관광청과 중소기업국도 동참했다. 중소기업국을 이끄는 케빈 킴 커미셔너는 검사 출신의 한국계 2세로 뉴욕 관광청이 한 국가의 기간행사를 돕는 이례적인 지원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한국문화원의 다음 목표는 올해 물꼬를 튼 이 행사를 연례적으로 기획하면서 내년부터는 재정적인 보강을 덧대는 것이다. 김천수 원장은 "대형 금융사들이 취지를 이해해 함께 나선다면 K컬처를 즐기는 뉴요커들에 충분한 마케팅 시너지가 날 것"이라며 "내년부터는 레스토랑 중심의 할인에서 한발 더 나아가 관련 K컬처 이벤트 대부분을 더 많은 이들이 저렴하게 누릴 수 있는 도구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준식 머니투데이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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